강원 횡성군 안흥면 소재지에는 찐빵 가게가 20곳 가량 된다. 찐빵 마을이다.
해마다 찐빵 축제도 연다. 안흥 찐빵이라는 이름의 찐빵은 이 마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 길거리 곳곳에서 이 안흥 찐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중에 이 마을에서 만들어낸 찐빵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만들어졌건 어떤 맛이 나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흥 찐빵이기만 하면 잘 팔린다. 신비로운 일이다.
갓 쪄낸 찐빵이다. 막걸리를 더하여 반죽한 것이라 약간의 시큼함이 있다.
이 냄새가 특히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소를 넣고 찌는 음식은 한국, 중국, 일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밀이 귀하니 메밀을 주로 이용하였다. 그 유래가 중국에서 온 것이라 하나 비슷한 시기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 민족의 음식으로 정착하였을 것이다.
밀가루 반죽에 소를 넣고 찐 음식을 한국에서는 만두라 하고,
중국에서는 바오즈(包子), 일본에서는 교자(餃子)라 한다.
찐빵은 그 만드는 방법이나 형태로 보면 만두의 하나이다.
김치만두, 고기만두 등의 작명법에 따르면 팥만두 또는 팥소만두라 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팥소가 들어간 바오즈는 더우바오즈(豆包子)로 부르고, 일본에서는 안만(餡饅•あん-まん)이라 한다.
餡[함]은 팥과 콩 등으로 만든 소, 즉 '앙고'이며, 饅[만]은 만두이다.
찐빵이라는 말은 구한말 빵이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 생긴 조어이다.
일제강점기 때 신문 기사에 나오는 찐빵 조리법을 보면, 베이킹파우더 등을 넣은 밀가루 반죽을 찌는 것은
지금과 같으나 그 안에 소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다르다. 그 당시에 화상이 운영하는 만두 가게가 많았을 것인데,
거기서는 팥을 넣은 만두도 팔았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화상의 만두 가게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는
지금의 한국 만두 가게에 이 찐빵이 꼭 있기 때문이다. 소 없는 찐빵이 사라지면서 만두 가게의 팥만두를 두고
누군가 찐빵이라 이르면서 이 말이 번졌을 것이다.
호빵은 1970년대 어느 식품기업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는 인스턴트 안만을 본따 제품을 만들어 팔면서 붙인 이름이다.
호-'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중국에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그 당시 대중의 인식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호빵에는 팥 외에도 채소가 든 것이 있는데, 이는 지금의 한국 음식 관습에서는 만두라 하여도 되는 음식이다.
찐빵 하나에 한중일의 음식문화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밀가루 반죽에 팥을 넣고 찐 음식을 두고 중국과 일본은 만두 계열의 음식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데,
왜 한국에서는 빵 계열의 음식인 듯한 작명을 한 것일까. 그러니까,
왜 한국인들은 찐빵을 팥만두 또는 팥소만두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음식 이름에는 간혹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그 음식에서 얻으려고 하는 욕구가 묻어날 때가 있다.
재료와 조리법에 따라 음식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욕구에 따라 이름을 짓는 것이다.
빵은,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귀한 음식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가루가 넉넉하였지만
당시 우리 부엌의 빈약한 조리 기구로는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없었다. 빵집도 중소도시 정도는 되어야 있었다.
빵 가격은 무척 비쌌고, ‘있는 집 자제들’이나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서민의 자제들’은 팥만두 정도에 만족해야 했었는데,
이게 빵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발견하였고, 그래서 누군가가 이를 찐빵이라 부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찐빵이라는 이름에는 빵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찐빵 속 팥소처럼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안흥 초입에 있는 찐빵 마을 상징물이다. 찐빵 캐릭터가 밟고 있는 것은 가마솥이다.
솥에서 막 쪄낸 찐빵을 꺼내고 있다. 겨울이라 솥에서 나오는 김이 따스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한국전쟁 이후 찐빵은 전국 어디에나 있는 음식이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주택가 길모퉁이 가게에서, 시장의 노점에서 흔히 팔았다.
이 흔하디 흔한 찐빵이 안흥이라는 조그만 산골에서 '터졌다'. 이 일을 두고 영동고속도로가 나기 전
안흥에 서울-강릉간 버스 터미널이 있어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그 영향으로 유명해진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또, 안흥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의 찐빵 제조 비법이 있는 듯이도 말한다. 그러나 그 당시
시골의 터미널 앞에는 으레 찐빵 가게가 한둘은 있었다. 또, 베이킹파우더 대신에 막걸리를 넣는다든지 하는
찐빵 제조 노하우는 공공의 정보였다. 안흥 찐빵이 유명해진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안흥은 '후치악'(치악산의 동쪽)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예부터 등산객이 자주 지나치는 곳이다.
1990년대 중반 안흥의 찐빵 가게가 어느 등산 잡지와 신문에 조그맣게 기사로 났다. 심순녀 씨가 하는 찐빵 가게였다.
당시 안흥에는 찐빵 가게는 이곳 하나밖에 없었다. 또 어느 구석에 다른 찐빵 가게가 있었다 하여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냄비 두어 개 내놓은 구멍가게였기 때문이다. 맛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열아홉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와 온갖 행상을 하다가 찐빵 가게를 차렸다는 심순녀 씨의 인생담이 더 눈길을 끌었다.
1997년 한국은 IMF 구제금융 시대를 맞았다. 기업은 도산하고 사람들은 직장을 잃었다.
1980년부터 승승장구하던 한국이 외채 구렁텅이에 빠져든 것이다. 이때에 가난의 시절에 먹었던 음식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기억할 것이다, 길거리마다 '옛날 짜장면' 간판이 즐비하였던 것을. 한국전쟁 이후 20~30년간의 가난을 생각하면
IMF 정도야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당시 언론들이 이런 음식을 집중 보도하게 되는데, 여기에 안흥 찐빵이 대표로 '걸려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안흥 찐빵이 '폭발'한 것은 1998년이었다. 단 1~2년 만에 2011년 현재의 찐빵 가게 숫자가 되었다.
안흥 찐빵이 지금도 인기가 있다는 것은 한국 경제 사정이 여전히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 싼 찐빵
찐빵은 가난의 음식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으나,
한국에서는 찐빵이 대중화될 즈음에 지독히 가난하였다.
그래서 그 가난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이 찐빵을 먹을 때이면 늘 이런 말을 한다.
그때 말야, 이거 한 개에 5원이었어." "나는 10원 줬는데." 2011년 현재 한 개에 500원 정도이며 상자로 사면 이보다 싸다.
글·사진/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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