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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여행] 유서깊은 강녕전

여행,사진방/여행후기1

by 그린체 2012. 3. 2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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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궁월이다

내가 경복궁을 관람하던 날도

몹시 추운날이라서 내국인은 별로 없었고

일본인 관광객과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참많았었다

차근차근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면 좋을텐데

남편과 함께 날이 너무 추워서 대충 보고 온것이 아쉬움을 남긴다

녹음이 우거진 어느날 다시 한번 찾아야겠다

 

 

 

 

천추전(千秋殿)은 왕의 편전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근정전이 큰 행사의 공간이라면

사정전 권역은 구체적 통치행위가 이루어진 실질적 업무공간이다.

이곳에는 두 개의 부속건물도 자리하는데 동쪽에는 만춘전, 서쪽에는 천추전이 있으며

두 부속건물은 아궁이가 있어 난방이 가능하나

중심건물 사정전은 마루로 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였나 보다.


 

 

아미산 굴뚝이 유명한던데

아쉽게도 이번 방문시에는 찾지를 못해서 아쉽고

천추전 건물 뒷족의 굴뚝만 사진을 찍었다

 

 

 

 



사정전은 생각 思, 정치할 政으로

곧 만백성을 생각해 가면서 어진 정치를 행하여 달라는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적 도덕률을 엿볼 수 있는데

근정전도 근면한 마음으로 정치를 행해 달라는 의미와 연관된다.
조선의 군주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아니라 따뜻한 어버이이기를 바랬다.

 

 

 

 

 

근정전안의 왕의 집무실

무척이나 넓은데 겨울에는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사정전에 대한 설명도

 

 

 

 

 

한옥의 깔끔함이 엿보인다

 

한옥은 전통 한국 건축 양식을 사용한 재래식 을 말한다.

조선집이라고도 한다. 현대식으로 지은 집은 '양옥'이라고 한다.

뒤로는 을 등지고, 앞으로는 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짓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는

배산임수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옛부터 남향집에 동쪽으로 대문을 둔 집이 명당집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아파트 시대이다 보니 그런집을 만나기가 쉽지도 않고...

 

 

 

 


 

앙부일구는 조선 시대인 1437(세종 19)년에 만든 해시계이다

전체가 반구형의 대접과 같은 모양이며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이십사절기를 13선의 계절선으로 나타내었다.

수직선으로는 시각선을 그었고 시표는 북극을 향하여 비스듬히 세워졌다.

흠경각에 처음 설치했고 종묘 앞에도 설치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는 의의가 있다.

 

  

 

앙부일구의 설명도

 

 

 

 

 

만춘전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

예전에는 사정전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만추전안의 내부

 

 

 

 


 

지붕위에 있는 조각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궁전 누문등의 지붕의 네 귀퉁이에 액을 막기 위해 줄줄이 놓아 장식하는

여러 가지 동물모양의 기와를 만들었는데

이 동물들을 장식하는 이유는 액을 막기 위한 것으로,

 그 형상은 주로 용, 봉황, 사자, 기린, 천마, 해마, 물고기, 해태, 원숭이 등이라고 한다

 

 

 

 

이문을 지나가면 내전이 나오는데

내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도 내전에 있는데 대왕대비, 즉 왕의 할머니의 거처이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초익공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 복원하였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령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강녕전 내부의 모습

 

정도전이 삼봉집과 태조실록에 강년전에 대해서 한 말이다

강녕전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홍범구주의 오복 중에 셋째가 강녕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연생전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 동쪽에 위치한 소침전이다.

정도전은 '하늘과 땅은 봄에 만물을 낳게 한다'는 뜻을 담아,

이곳 동쪽 침전에 '연생전'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유교의 예법에 따르면 왕은 중앙에 중심 건물인 연침을 두고 계절별로 소침을 두어

침전을 돌아가며 사용하는데,

천자는 6개를, 제후는 3개를 두었다고 한다.

이에 강녕전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소침을 두었으나,

실제로는 계절과 상관 없이 사용했다 한다.

소침은 침전이지만 사적인 공간보다는 신하와 함께 정무를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향오문을 들어서면 국왕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강녕전이 있고,

그 동쪽편에는 독립된 건물인 연길당이다.

연생전 뒤쪽에 있는 건물이고 서쪽의 응지당과 짝을 이룬다.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다.

뜻풀이로  ‘연길(延吉)’은 ‘복을 맞아 들인다’는 의미이다.

 

 

 

 

 

 

경성전은 강녕전의 서쪽에 위치한 왕의 침전으로

연생전과 함께 강녕전을 보좌하는 소침전이다.

정도전은 '가을에 결실을 맺는다'는 뜻으로 서쪽 침전을 '경성전'이라 명명하였다.

 

 

 

 

 

함화당 과 집경당은

 중궁전인 교태전의 뒷뜨락의 예쁜 정원을 돌아보고

향원정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흥복전과 많은 빈들의 거처인

후궁영역의 내전이다

 

 

 

 

 

예전에 사용하던 우물이 이런 모양인가

 

 

 

 

 

당과 당을 연결해주는 문을보면  참으로 예술적이다

갑자기 이곳을 보고 있노라니

사극에서 궁녀들과 내시들이 드나들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며 문을 들어선다

 

 

 

 

 


양의문을 지나서 교태전으로 들어간다

 양의문은 교태전 남쪽 행각의 문이다.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으로,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있는 괘 이름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교태전 내부의 모습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

그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본래 교태전 건물은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대조전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재건되었다

 

 

 

 

 


교태전 안에서 찍은 양의문의 모습이다

양의(兩儀)란 본래 ‘양과 음’을 말하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유래해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의 뜻도 지닌다.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 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으니,

팔괘가 길흉(吉凶)을 정하고 길흉이 큰 사업(事業)을 낳는다.”고 했다.

 

 

 

 

 

교태전의 단청이 아주 멋지다

 

단청은 옛날식 건물의 벽과 기둥, 천장 따위에

여러 가지 색으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림. 또는 그 그림이나 무늬를 말한다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은 한국의 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흠경각은 천체를 관측하던 간의, 천문시계인 옥류, 해시계 앙부일구등을 보관하던 건물이고,

 함원전은 궁중의 불교 관련 시설이라고 한다

 

 

 

 

 


함원전은 경회루와 교태전 사이에 있다.

함원전의 굴뚝이 놓인 뒤편 화계와 교태전의 아미산 화계가 담 하나 사이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세종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함원전에 관한 기록은 무척 이채롭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한 뒤 당시 왕세자인 노산군(단종)이 잠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는 기록도 엿보이지만,

경복궁의 내전 깊숙이 위치해 '불사를 주로 행하던 공간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담장 그리고 기와 문양들이 어쩌면 저리도 멋스러울까

감탄을 연발한다

 

 

 

 


 

신무문에서 유형문으로 가기 전 동쪽으로 난 문이다.

       현판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걸려 있다.

     현재의 현판은 2005년 태원전 복원 공사 때 만들어졌다.

 


광림은 ‘널리 내려다 봄’을 뜻한다.

          임금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살피듯,

모든 일을 밝게 살핀다는 뜻을 담고 있다. '

          임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본다는 뜻이 있다.


 

 

 

지금도 짓고 있는 궁궐이다

 

 

 

 

 

장안당의 앞편 담에 있다.

  뒤쪽으로 관문각과 통하던 관명문과 취규문이 있다.
 

필성(弼成)은 ‘도와서 이룬다’는 뜻이다.

                ‘필(弼)’은 ‘도우다’, ‘성’은‘이루다’는 뜻이다. 

                필성은 신하가 임금을 보필하여 공업을 이룬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벽돌로 만든 월문(月門)이며, 글씨는 돌에 새겼다.

 

 

 

 

 

 

고종의 서재.

원래 전통적 목조건물이었으나,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설계로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건청궁은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을미왜변 직전 고종과 명성황후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해 1909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사라졌으며,

대신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다.

이후 이 미술관은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됐다.

건청궁 복원은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여 만에 마무리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되는 비운의 궁이 건청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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