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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여행] 유서깊은 근정전

여행,사진방/여행후기1

by 그린체 2012. 3. 1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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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여행

 

삼월 둘째주 일요일날 곷샘추위로 바람이 심하게 부는날,  

광화문쪽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오랫만에 경복궁을 보러갔은데 워낙 바람이 많이 부는날이라서 그런지

내국인은 별로 없고  주로 일본관광객과 중국관광객들이 아주 많았다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궁의 넓이는 43만2703(432,703)㎡ 이고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이는데

현재 1차 복원사업이 완료된 상태이고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경복궁의 정문(正門)이자 국권이 드나드는 왕권의 상징성을 갖는 문이기도 하다.

창건초기에는 오문(午門)  이라 칭하다가 세종 조에 이르러 동서남북 4방위의 문들이

각각 이름이 붙여져 오문은 광화문으로 명명되는데 의미는 "빛이 나라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 광화문도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신축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철거당하여

건춘문(동쪽문) 북쪽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8년에 현위치로 자리잡게 되는데

본 위치에서 약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고 문루(문의 상부)는 6.25동란에 소실되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으며 3개의 홍예(아치)가 아름다움과 권위를 겸비한 조선궁궐의 정문이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이 장관이다

 

 

 

 

 


광화문을 들어서니 넓은 광장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그옛날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거했겠지

아직은 봄이라고 하지만 날이 워낙 쌀쌀해서 썰렁했지만

따뜻한 봄날에는 이곳도 화려함의 꽃을 피우겠지요

요즘 해를 품은달이나 무신등 사극을 보다보니 어느시대이던간에

그옛날의 부귀하고 화려했던 왕조들이 생각나고

갑자기 왕을 만나러 이곳에 온 것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용호문 뒤로 인왕산이 환하게 보인다

 

인왕산은 높이 338m. 산 전체에 화강암으로 된 암반이 노출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조선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왔다.

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중이 장삼을 입은 듯한 선바위(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잘 이루어졌다고 하여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무신당인 국사당을 선바위 옆으로 옮긴 뒤부터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으며, 주위에 많은 무신당이 생겨 지금도 굿이 성행하고 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성곽이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자하문·명륜동·

동대문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사직동·홍제동까지 이어진다.

군사적인 이유로 한때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사직공원·청원 아파트·

무악재길 등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다.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2006년 12월까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 구 광화문은 철거되었고, 한일 병합 조약 100년인 2010년 8월 15일

기울어졌던 3.75도를 바로잡고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경복궁에 대한 설명과 위치건물 약도

 

 

 

 

 


흥례문을 지나면 영제교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옆의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들만 보여서 꽃피는 봄이오면 아주 멋질 것같다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근정전으로 들어가기전에 근정문을 지나야 하는데 경복궁의 화려함에 놀란다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흥

례문을 비롯하여 이곳도 해체 철거되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고 이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다.

 

 

 

 

근정전일원 근정전 층계석

 

 

 

 

 

근정문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고 한다

 

 

 

 


 

궁궐(宮闕)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며

그 외 나라를 다스리는 곳, 즉 통치를 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근정전은 이 공적인 공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국가적 큰 행사로, 조하(朝賀)라고 해서

군신간에 연초 하례가있고 조회(朝會), 즉위식(卽位式), 책봉례(冊封禮),

고급관리 임용식, 사신영접(중국) 등 국가의 대사가 행하여졌다.


중심건물인 근정전은 궁궐 내 가장 높은 건물로 상, 하 월대와 돌난간을 두루고

난간의 모퉁이에는 12지신상 및 방위신상의 서수를 조각하여

위용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해 놓았다.
그 외에 답도, 드므, 정, 품계석, 박석, 근정전내 어좌, 보개, 일월오봉병 등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이 많은 조선조의 조정이 있는 곳이다.

 

 

 

 

 

 

근정전 동쪽 행각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세밀하고 웅장하여 경복궁의 위용을 느낀다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의 동물들

우리 나라에서 돌로만든 짐승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곳이 경복궁이다

광화문 앞에있는 해태 두마리, 영제교의 천록, 경회루 난간,

근정전 월대의 법수까지 수 많은 동물조각이 경복궁에 있고

그 중 근정전 월대에만 56마리의 동물 조각이 있습니다.

 

우선 근정전 기단에 있는 동물을 세부류로 나눌수 있는데

그 첫번째로 사신이라 불리는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북쪽의 현무, 남쪽의 주작이고

현무는 거북이처럼 생겼고 보통 뱀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주작은 봉황처럼 생겼고

사신은 하늘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상상의 동물로 공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십이지신입니다.

배치상태를 보면 북쪽에 쥐, 동쪽에 토끼, 소와 뱀, 남쪽에 말과 호랑이

서쪽에 닭과 양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십이지는 시간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의 사신상과 십이지상은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구현한 것으로 우

주의 속성을 지상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해태인지 알 수 없어 서수라고 부르는 조각으로

계단의 난간이나 난간 모퉁이 기둥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근정문 현판

근정전이라는 노란글씨체가 힘이 있고 위엄을 느끼게 하고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사찰등의 단청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기품을 느끼게 하는 우리민족의 혼이며 자랑이고 예술품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정일품에서 종일품등

 

 

 

 

 


근정전 건물 외관은 충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방원 태종과 세종등 왕들이 이곳에 앉아서 정무를 보았겠지

단상이 높고 화려함에 왕에 대한 위엄이 하늘에 치솟는다

경복궁 근정전 보좌일월오봉도가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 보면 2층이나 안은 전체가 한공간으로 트여 있는 근정전 내부의 천장

 

 

 

 

 

 

근정전 실내에 있는 칠보향로

 

 

 

 

 

등과 촛불과 촛대

 

 

 

 

근정전을 바치고 있는 대들보의 둘레가 놀랍다

 

 

 

 

 

근정전 빗살창호&칸이다

 

 

 

 

 

드라마나 영화속의 한장면으로 문무백관들의 모습이다

 

 

 

 

 

근정전 월대 정 향로이다

 

향로는 삼국사기권 4 법흥왕 15년조와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조에

신라 눌지왕 때 불교전래와 함께 양나라로부터 향을 가져왔다고 하는 기록이나

1993년 12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향로, 익산왕궁리5층석탑 에서

발견된 향목,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유향, 향목편, 심향편 등으로 보아

일찍부터 향공양의 그릇으로서 향로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향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향로,

고구려 쌍영총의 부인행렬도, 신라 단석산 신선사마애불상군 의 공양상,

성덕대왕신종 비천상 등을 통해 당시에는 주로 청동이나 금동으로

만들어진 향로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청동제의 향완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향완은 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가 있는 형태로 이후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면서 사찰의 공양구로 사용되었다.

향완은 표면에 은입사 문양과 연대나 절 이름을 포함한 명문이 새겨져 있어

상감청자의 발생 문제와 함께 당시의 사회상이나 불교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드므는 '입이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예전에 이 드므에 물을 가득 담아 놓았다고 한다.

이는 궁궐의 건물들이 대부분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축물이기 때문에

화재를 막기 위한 주술적이고, 예방적인 상징성을 나타낸다.

화재를 일으키는 화마(火魔)가 드므에 담긴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다른 화마가 먼저 와있는 것으로 알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는 흉칙하게 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이야기가 전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근정전의 옆모습도 웅장하니 화려하다

겉으로보면 2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한층이다

 

 

 

 

 

근정전을 지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본인 단체들이다

 

 

 

 

 

광화문을 들어와서 안에서 찍은 모습니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해태상은 옛 궁전, 절간 등에 사자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조각물이다

원래는 편종을 바치는 틀에 새겨진 동물의 모습이었으나

그 뒤 왕권의 위엄과 수호를 위해 조각물로 세우기 시작했다.

궁중에서 사용하던 여러 기물과 사찰에서 쓰이던 물품들에도 이러한 모양이 나타난다

원래 해태는 시비(是非)나 선악(善惡)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로 고대 사회 때부터 등장하여

봉건 군주의 기강과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시대마다 약간씩 다르게 변형되어 왔으나 사자의 모습과 비슷하고 머리에 뿔이 하나 있다

 

 

 

 

 

 

경복궁은 사적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56 번지에 위치,

규모는 연 면적 약 127,000평 (416,990㎡)에 이르며,

궁궐 내에 근정전, 경회루의 국보와 자경전, 아미산 굴뚝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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