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는 곡물 가루를 반죽하여 가늘게 가락을 만들어 먹는 음식을 말한다.
이 국수의 대부분은 밀가루로 만든다.
밀에는 글루텐이란 성분이 있어 반죽을 하면 인장력이 생기고,
따라서 가락을 길게 늘일 수 있어 국수를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메밀은 글루텐이 거의 없어 반죽을 하여 늘일 수가 없다.
그러니 반죽을 늘이는 방식으로 국수를 만들 수가 없다.
반죽을 넓게 펴 반대기를 만든 후 돌돌 말아 칼로 썰든가,
반죽을 국수틀에 넣고 눌러 뽑는 방식으로 국수를 만든다.
막국수는 메밀가루 반죽을 국수틀에 넣고 누르는 방식으로 면을 뽑는다.
여기에 갖은양념으로 비비거나 동치미 국물 등으로 말아 먹는다. 대체로 차게 먹는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메밀 제분 방법에서 온 것이다.
메밀은 겉껍데기을 벗기고 분쇄를 하여 가루를 얻는데,
옛날에 설비가 좋지 않았을 때 겉껍데기째 맷돌 등에 갈아 국수를 내려 먹기도 하였고,
아무렇게나 '막' 갈아 국수를 내렸으니 막국수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막국수에 그 '흔적'으로 거뭇거뭇한 겉껍데기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제분기로 '정상적인' 작업을 하면 겉껍데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춘천 어느 식당의 막국수이다. 막국수는 강원도의 음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춘천 막국수'라 하여도 춘천식이라 할 수 있는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밀은 귀하였고 메밀이 흔하였다. 따라서 메밀국수를 흔히 먹었으며,
일제강점기만 하더라고 국수라 하면 으레 메밀국수를 뜻했다. 메밀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는데,
한반도 사람들이 이 메밀로 처음 만든 국수는 칼국수 방식의 국수였을 것이다.
메밀가루에 원통의 막대기와 칼만 있으면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메밀칼국수는 강원도 일부 지방에 남아 있으며, 더운 국물에 말아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메밀칼국수에다 동치미 같은 찬 국물을 더하는 국수도 있었을 것인데,
찬 국물의 메밀칼국수는 그 흔적이 사라졌다.
반면에, 같은 메밀국수 문화권인 일본에서는 차게 먹는 이 '메밀칼국수' 전통을 잇고 있다.
이 국수를 소바라 한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한반도에서는 칼국수 방식보다
국수틀에 반죽을 넣어 눌러 뽑는 방식의 메밀국수가 크게 번졌다.
이 방식으로 뽑은 메밀국수에는 더운 국물을 넣지 않고 찬 국물을 더한다.
평양냉면과 막국수가 그 대표적인 이 찬 국물의 메밀국수이다.
한국인은 평양냉면과 같은 계열의 음식으로 함흥냉면을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음식 이름에 '냉면'이라는 같은 단어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재료를 보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먼 거리에 있는 음식이다.
평양냉면은 메밀 음식이며, 함흥냉면은 감자 음식(요즘은 고구마를 흔히 쓴다)이다.
재료와 먹는 방식으로 보자면 평양냉면과 같은 계열로 놓을 수 있는 음식은 막국수이다.
둘 다 메밀로 면을 만들고, 국수를 뽑는 방식이 같으며, 찬 국물을 더하는 것도 같다.
평양냉면류의 찬 메밀국수를 북한에서는 국수 또는 모밀국수라고도 부르는데,
막국수라는 이름이 1970년대에 들어 크게 퍼진 것이고 그 전에는
강원도에서도 모밀국수, 뫼밀국수 등으로 불렀다고 하므로
평양냉면과 막국수를 형제지간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물론, 맑은 고기 국물의 평양냉면과 벌건 갖은양념 국물의 막국수가
사돈의 팔촌처럼도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메밀국수는 국수틀로 뽑는다. 옛날에는 이를 나무로 만들어 썼다.
받침나무와 누름나무가 짝을 이루고 있는 틀인데,
받침나무에 구멍을 파고 그 구멍 아래에 작은 구멍을 송송 뚫은 쇠붙이를 붙여놓았다.
누름나무에는 받침나무의 구멍에 들어가는 공이가 붙어 있다. 이 국수틀을 가마솥 위에 걸고
받침나무 구멍에 반죽을 넣어 누름나무를 누르면 쇠붙이의 구멍으로 국수가락이 삐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국수틀에 대한 기록은 18세기의 [임원십육지]에 처음 나오는데,
그 이전부터 이런 국수틀을 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국수틀은 장정 서넛은 붙어야 국수를 내릴 수 있고 부피도 커
대갓집이라 하여도 이를 갖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강원 춘천시 동면 상걸리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을에 공용 국수틀을 하나 두고 일이 있을 때
이를 빌려 사용하였다고 한다. 물론 주막 중에는 이 국수틀을 늘 두고 있는 곳도 있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메밀국수 식당들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평양냉면은 그때에 벌써 유명하였다.
당시 만주에서 메밀을 상당량 수입하여 재료가 풍부한 덕이 컸을 것이다.
또 국수틀의 개량이 메밀국수 식당을 늘리는 데 한몫을 하였을 것이다.
1932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에 국수 기계 발명 기사가 났는데, "함남 함주군 서호에서 철공업을 하는
김규홍 씨가 일즉 조선국수(냉면) 긔게 제조에 전력을 가하야" 그 완성을 보았다면서,
재래식보다 3배의 속도로 국수를 뽑을 수 있어 3개월의 인건비만으로 기계 두 대를 살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 이듬해인 1933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에도 국수 기계 발명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발명자인 천임복 씨(그 역시 함주군 사람이다)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천씨가 자기 친우와 가치 국수집에 갓다가 국수 누르는 데 너무 시간 걸리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잇서
그후부터 간편하고도 쉽게 사용할 수 잇는 기게를 만들어내기로 결심하고 이 기게를 발명하엿다는데
사용하기가 가장 편리하야 십삼사 세 되는 아이라도 혼자 사용할 수 잇고 중량은 삼 관도 못 되니
옮겨가지고 다니기에 편하며 국수 반죽이 조금도 허비되지 아니하고 삼 분간이면 될 수 잇고
값은 보통 기게의 반액밖에 되지 아니하는 가장 편리한 기게라 한다."
두 기사에는 기계 사진도 있는데, 동력 장치 부분을 빼면 지금의 국수 누르는 기계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 건물이다. 지붕 위 나무는 국수틀, 건물은 가마솥 형상이다.
박물관 안에서 막국수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춘천 명동 거리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덕에 일본 관광객이 이 거리에 많다.
그들은 대체로 막국수보다 닭갈비를 선호한다고 한다.
막국수는 소바와 주요 재료는 같지만 그 맛이 확연히 달라 어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까지 번창하였던 메밀국수 식당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적어도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결정적 이유는 밀가루이다. 미국의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가루는 값싼 밀국수 식당을 양산하였다.
또, 한반도 메밀의 주요 산지인 북녘의 땅과 갈라져 메밀이 다소 귀해진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정부는 혼분식 장려 정책을 쓰면서 밀가루 음식을 크게 퍼뜨렸는데,
칼국수, 잔치국수, 우동, 자장면 등의 밀국수가 메밀국수를 적극적으로 밀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1970년 즈음의 상황을 보면, 한반도 남쪽에서의 메밀국수는 서울의 평양냉면 전문점 몇 곳과
메밀 산지인 강원도 일부 지역의 메밀국수집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메밀국수의 나라'에서 '밀국수의 나라'가 된 것이다.
서울과 기타 여러 지역에서는 사라져갔던 메밀국수가 춘천에서는 그 명맥을 웬만큼 유지하였는데,
춘천이 강원 지역의 곡물 집산지였던 것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강원도의 메밀이 모이니 제분산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또 메밀국수 식당도 유지가 되었던 것이다.
1965년 춘천댐, 1967년 의암댐, 1973년 소양강댐이 완공되면서 춘천은 호반도시란 낭만적인 이름을 얻었고,
서울 시민들의 하루 관광 코스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70~80년대 경춘선 기차를 타고
호반도시로 데이트를 오는 젊은이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은 춘천의 메밀국수에서 짙은 향토성을 맛보았다.
춘천에서는 이 메밀국수를 막국수라 부르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춘천에 오면 막국수를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이 여겼다.
1970년대 중반 춘천에는 30여 곳의 막국수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2012년 현재에는 130여 곳의 막국수집이 있다.
글·사진/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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