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의 원산지는 인도로 알려져 있다.
백제 유적지에서 탄화 녹두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재배되었을 것이다.
예부터 녹두는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그 가루에 전분이 많아서 결착력을 높이거나
찰기와 끈기를 더하는 음식재료로 활용되는 일이 많았다.
전분을 뜻하는 녹말(綠末)이라는 단어 자체가 ‘녹두 분말’에서 온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이 유입되기 전 전분은 대체로 녹두에서 얻어 썼을 것이다.
간편하기로 보자면, 녹두는 갈아서 죽을 쑤거나 부침개를 해서 먹는 게 가장 흔하였을 것이다.
녹두를 갈아 앙금을 내려 얻은 녹말로는 묵을 쑤고 먹었다. 또 이 녹말은 메밀면을 만드는 데 첨가되었다.
[동국세시기]에는 녹두가루의 반죽을 익힌 후 채 썰어 오미자 물에 띄우는 화면(花麵),
꿀물에 띄우는 수면(水麵)이 나오는데, 녹말로 만든 청포묵을 채 썰어 조리한 음식일 것이다.
싹을 틔워서 나물로도 먹었다.
녹두는 녹색의 작은 콩이다. 사진의 녹두는 갓 수확한 것이다.
하얀 분이 인 것은 녹말로 보인다.
녹두 음식 중에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것이 빈대떡과 숙주나물, 그리고 청포묵이다.
이 음식들이 한국인에게 무척 친근한 음식임에도 그 원료인 녹두에 대해서는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녹두를 원료로 하는 음식인데 그 이름에 녹두가 붙지 않아 생기는 일일 수도 있고,
근래 녹두 농사가 많지 않아 농촌에 가서도 녹두를 보지 못하여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녹두 음식 이름에는 여러 재미난 이야기가 붙어 있다.
녹두나물이 숙주나물이 된 것은 조선시대 변절한 신하의 상징인 신숙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또 청포묵으로 만드는 요리인 탕평채는 영조가 탕평책을 내놓으면서 먹은 음식이라는 설이 있다.
빈대떡은 그 유래에 대한 설이 복잡한데, 녹두의 우리말을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가
이 음식 이름에 있으므로 조금 길게 정리하였다.
첫째, 빈대떡은 빈대(賓待)떡, 즉 귀빈을 접대하는 떡이란 말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다.
억지스럽다. 귀빈을 접대한다는 뜻이 되려면 한자어 구성 원리상 대빈(待賓)떡이라 해야 한다.
둘째, 빈자(貧者)떡, 즉 가난한 자의 떡으로 빈자떡이라 하다가 빈대떡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셋째, 중국음식 이름인 병저(餠藷)가 빙자→빈자→빈대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신빙성 있는 설은, 빈대가 바로 녹두의 우리말이라는 주장이다.
한자로 녹두(綠豆)는 ‘푸른 콩’이란 뜻이다. 녹두의 사투리(또는 옛말)에 푸르대가 있다. 사전에도 올라 있는 단어다.
우리 민족은 콩 이름에 ‘-태’라는 접미어를 붙였다. 서리태, 백태, 흑태, 오리알태….
이를 한자로 ‘-太’라 쓰지만 이 한자는 표기를 위해 빌려온 것일 뿐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콩을 ‘-太’라 하지 않는다.
푸르대의 ‘-대’는 ‘-태’와 같은 것으로 콩을 말한다. 이 푸르대가 풀대→분대→빈대로 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녹두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란다. 거름 진 땅에서는 키만 크고 열매는 부실하다.
또 다소 늦게 심어도 수확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그래서 봄에 파종한 작물이 가뭄 등으로 망가졌을 때 녹두가 그 대체작물로 심어졌다.
또 보리 후작으로도 많이 심어졌다. 6~7월에 파종하면 9~10월에 수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녹두 농사가 예전 같지 않다. 농민들이 꺼린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녹두는 밑에서부터 차례대로 꽃이 피고 꼬투리가 달리는데 콩알이 익는 것도 차례대로 일어난다.
녹두는 완전히 익은 것을 그냥 두면 꼬투리가 터져버려 콩알이 여기저기 흩어져버린다.
그래서 다 익어간다 싶을 때 이를 골라 따야 한다. 녹두의 익음에는 보통 3~5차례의 순차가 있고,
따라서 녹두 수확을 3~5차례 나누어 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에 타작을 해도 되는 콩과 팥에 비해서는 품이 많이 드니 재배를 꺼리고, 그러니 국산 녹두는 귀하다.
최근에 수확을 한번에 해도 되는 녹두가 개발되어 실증재배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녹두의 꼬투리이다. 검은색의 것이 다 익은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녹두는 한번에 다 익지 않는다.
녹두장군 전봉준 고택 바로 앞의 농가에서 올해 거둔 녹두이다. 텃밭에 조금 심었다.
“녹두”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면 대부분 사람들은 녹두장군을 떠올린다. 동학농민전쟁을 이끈 전봉준이다.
그 전쟁은 당시 고부군에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고부군이 없다.
일제가 동학농민전쟁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부군을 부안군, 고창군, 정읍군으로 찢어발랐고,
고부라는 지명은 현재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로 남아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의 유적은 정읍시에 몰려 있다.
녹두장군이 살았던 집, 녹두장군이 처음 군사를 일으킨 말목장터, 관군과 싸워 이긴 황토현 등등이 정읍에 있다.
녹두장군의 고장이니 녹두 재배를 많이 할 것이 아닌가 여겨 관련 기관에 문의하였으나 규모 있는
녹두 재배 농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논두렁밭두렁과 텃밭에 가용할 것으로 조금씩 심을 뿐이었다.
여느 농촌의 녹두 재배 사정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황토현 부근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앞에 녹두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풀이 가득하였는데 한참을 뒤지니 녹두가 보였다.
한때 녹두를 재배하였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하면서 남은 흔적이었다.
다 익어 검게 변한 꼬투리를 손에 쥐니 기다렸다는 듯이 강력한 힘으로 녹두가 튕겨 나왔다. 폭탄 같았다.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한 것은 키가 작기 때문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글·사진/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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