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평야는 동쪽에 한강, 서쪽에 황해를 두고 있다. 강화도와의 사이에 있는 바다는 좁지만 바다는 바다이다.
따라서, 김포평야는 강과 바다를 양옆에 두고 있는 반도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강과 바다에서 온 퇴적 토양으로 땅이 기름져 예부터 벼 재배지로 주요하게 취급되었다.
서울과 맞붙어 있는 남쪽의 김포는 신도시 개발로 평야를 많이 잃었지만 북쪽으로는 여전히 논농사가 흔하다.
자광미이다. 자색의 빛이 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묵은 것이라 빛이 나지 않는다. 화석 같다.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탄화미를 근거로 한 것이다.
탄화미가 발견되면 해당 지자체는 이를 이용한 마케팅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 발견된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의 탄화미는 추가 발굴와 연구를 거쳐 4,000~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어내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때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지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한강 바로 건너편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도 그 비슷한 연대의 탄화미가 출토되었다.
또, 1998년과 2001년에 조사된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유적지에서는 놀랍게도
1만3,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탄화미가 나왔다. 탄화미 마케팅은 당분간 청원군이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먼 옛날의 탄화미와 현재의 쌀 품질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초 마케팅’이란 것도 허구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한때 한반도 최초 쌀 재배지라 하였던
김포시도 그 지위를 빼앗겼다고 섭섭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수천 년간 벼농사를 지었으니, 토종 벼가 있다.
1920~30년대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300~500종의 토종 벼가 심어지고 있었다.
일제는 이 한반도 토종의 벼를 개량하거나 외래종으로 대체하였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국립식량과학원의 ‘재래 벼 품종’ 소개에 잘 나타나 있다.
재래종은 대부분 조생 내지 중생종이 많고 대체로 키가 크며 분얼력이 적고 도복에 약하다.
또한 대립종이 적고 한 이삭당 벼 알수가 많은 것이 보통이고 대부분 까락이 있으며 벼알이 잘 떨어진다.
도열병에는 약하나 가뭄에 비교적 잘 견디며 저온에서 발아가 잘 되는 편이다.”
수확량이 적고 잘 쓰러지며 병해에 약해 경제성이 적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토종 중에 진상미로 소문이 난 것이 있다. 이천의 자채미와 김포의 자광미이다.
조선의 왕가가 이 벼를 직접 관리하였다거나 이 쌀을 꼭 찾아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말로써 전할 뿐이다.
그러나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채미의 경우는,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수확한다.
7월 말이나 8월 초이면 거둘 수 있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수확한 쌀이니 왕가에 바쳤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광미의 수확기는 이보다 다소 늦은 9월 초이다. 그래도 대체로 추석 이전에 거둔다.
한양과 가까웠으니 이 이른 쌀도 왕가에 갖다 바쳤을 수 있다.
김포시농업기술센터의 자료에는 진상미로서의 자광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자광벼는 약 300년 전 중국 길림성에 갔던 사신들이 밥 맛이 좋다는 볍씨를 가져와 당시의 통진현(현재 김포시 월곶면)
밀다리’ 밑에서 심은 것으로부터 유래되어 밀달쌀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광벼는 쌀의 색깔이 엷은 자색(紫色)을 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밥맛이 끈기가 있고
구수한 향기가 있어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진상미로 손꼽혔습니다.”
김포의 자광미 마지막 재배 농민인 권유옥 씨이다. 종자는 아직 가지고 있다.
2년 묵은 자광미이다. 너무 말라 깨진 쌀알이 많다. 권유옥 씨의 창고에서 꺼낸 것이다.
자광미는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재배되었다.
김포 자광미 재배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조선 진상미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유당 시절부터 대통령 관저에 이 쌀이 보내어졌다고 한다.
이들은 “근래에도 자광미를 챙기는 공무원들이 있었다”는 말로 그 유구한 진상의 전통을 증언하였다.
진상미 유명세 덕에 자광미는 한때 없어 못 파는 쌀이었다.
1980년대 말에 9명의 농민이 자광영농법인을 설립하고 판매장까지 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이 일은 시들하여졌다. 재배 면적이 차츰 줄어 판매장도 닫았다.
2011년 현재 김포에서는 자광미가 없다. 그 이유에 대해 농민들은 외부 요인으로
관의 보조와 관심 부족”을 들었고 내부 요인으로는 “농사 짓기 힘들어서”라고 하였다.
2009년까지, 자신이 아는 바로는 적어도 3대째 자광미를 재배하였다는 권유옥 씨(71세)는
자광미는 손이 많이 가고 수확량이 적어 적절한 판매 가격을 맞추기 어렵다고 하였다.
키가 130센티미터가 되는데 비료 주면 쓰러집니다. 비료 없이 재배하자니 정말 힘듭니다.
수확 전에 태풍이라도 닥치면 벼가 논에 쫙 깔립니다. 낟알도 크지 않아 수확량은 일반 벼의 절반입니다.”
그는 관의 지원 없이 자광미를 재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혹여 다시 자광미를 재배할 수 있을까 하여 15킬로그램 정도의 종자를 챙겨두고 있었다.
다른 농민들은 종자도 없앴습니다. 벌써 두 해를 넘겨 발아율이 절반은 될까 싶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아율 떨어지듯 자광미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흐릿해질 것이다.
글·사진/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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