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소녀의 유일한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 입니다".
1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대한의 딸,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독립운동가의 유언이다.
유관순은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한 연락원으로서 활동 하였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시작된 시위에 참가한 유관순은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
유관순은 항소가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였으나
오히려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옥중항쟁을 계속하다가 1920년 17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후 당시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는 위협과 강력한 항의로 유관순열사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으나,
그 시신은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벌지 대전투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독일군을 전선에서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북부를 거쳐 벨기에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상대적으로 넓게 퍼진 전선을 형성하며 흩어져 있었다.
노르망디에서 일격을 당하고 프랑스에서 퇴각한 독일군은 절치부심 전세의 역전을 노렸고 급기야
벨기에 남부 아르덴에서 미군 48사단을 공격하게에 이르렀다.
악천후에 의해 공중지원을 받지 못한 미군은 전선을 사수하지 못하였고 독일군 기갑부대와 제5군은 바스토뉴를 함락시키며
미군진영 깊숙이 진격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반격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미군이 조지 패튼이 이끄는 제3군을 앞세워 12월 26일 바스토뉴를 탈환하며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다시 잡기 시작한 것이다.
1월 3일 제1군이 가세하여 전선을 더욱 밀어붙이자 독일군은 부족한 군수품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계속되는 패배와 철수를 거듭하게 되었다.
아르덴 전투라고 불리기도 하는 발지전투는 결국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편 마지막 공격이 되었고
이후 독일은 패망의 길로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다.
비구상회화의 선구자, 칸딘스키
추상 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청기사파를 창립해 미술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칸딘스키. 러시아태생인 그는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 귀화한 칸딘스키는 1896년 뮌헨에서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10년 최초의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1911년 뮌헨의 예술가 집단인 청기사파를 프란츠 마르크와
조직하였으며 이후 비구상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미술학교 교수를 지냈고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 교수로 지내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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