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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와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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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체 2010. 11. 30.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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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태조 한양으로 천도

 

조선조 태조 한양으로 천도 내용시작

 

 

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한 이래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하고자 수도를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새로운 곳으로 옮길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개경은 고려 왕조의 수도였으며 풍수지리설로 보아도 지덕(地德)이 이미 쇠퇴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계룡산, 모악(母岳, 현재 신촌동ㆍ연희동 일대)등의 후보지를 살펴본 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자'는 상신(上申)에 따라 1394년 9월 27일 (음력 8월 24일)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한양은 도성(都城)과 성밖 10리까지의 지역을 경계로 1395년에 경복궁, 종묘(宗廟), 사직(社稷) 등을 건설하고

북은 백악(白岳), 동은 낙산(駱山), 남은 남산(南山), 서는 인왕산(仁旺山)을 연경하는 도성을 축조하였으며

출입문으로는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세웠다.

오늘날 서울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ㆍ

태평양시대를 주도하는 국제도시로서 도약하였다.

 

 

 

수원성곽 복원

 

수원성곽 복원 내용시작

 

조선조 성곽 건축 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정조대왕의 애절한 효심이 서려있는 수원성(水原城)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당쟁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심과 개혁 의지로 축조한 성이다.

원래의 명칭은 `화성(華城)`이며, 1794년에 착공 2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18세기 실학자들의 지혜가 결집되어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거중기, 녹로, 활차 등

근대과학적인 장비를 개발·사용하여 축성한 수원성곽은 중국, 일본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정치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수원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 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인돌 유적지 세계유산으로 등록

고인돌 유적지 세계유산으로 등록

 

내용시작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지난 2000년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강화·화순·고창의 고인돌 유적은 밀집분포도나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며,

장례 및 의식유적을 만들어냈던 선사시대 기술 및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어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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