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정 부통령 취임식
948년 7월 24일 지금은 허물려 없어진 중앙청 앞 광장에서는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을 비롯하여 비가 내리는 속에서도 국내, 외 많은 귀빈과 국민들이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을 감격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연단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조국을 만년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다짐하였고,
계속된 부통령 취임사에서 이시영 부통령은 건국흥업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대한민국 최초의 정·부통령 선출은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실시한 1
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7월 20일 제헌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이루어 졌다.
그 결과 득표율 92.3%로 이승만 후보가 대통령에, 부통령 선거에서 출석의원 197명 가운데
133표를 얻은 이시영 후보가 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비록 이날 치러진 취임식은 남한만의 총선거로 구성된 반쪽 국회에 의하여 실시된 대통령선거의 결과였지만
이를 토대로 8월 15일 '정부수립 선포식'을 거행함으로써 제1공화국의 출범이 이루어졌으며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헌정체제(共和憲政體制)를 시작하였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시영 부통령은 임기 1년을 남긴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항의의 뜻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무리한 정치적 선택을 통하여 4선 되었으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하야하였다.
http://www.kstamp.go.kr/sp/sg/spsg0102.jsp?tbsmh15seqnum=99&tbsmh01seqnum=31
라틴아메리카 탄생의 주역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해방자 또는 국부로 숭앙되며 오늘날까지도 남아메리카 지역 각지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는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7.24~1830). 그의 이름은 볼리비아 국명의 유래에서부터 남아메리카 곳곳의
지명과 명칭 화폐에 이르기까지 흔적이 남아있다.
매우 정열적이고 때로는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스페인계 베네수엘라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유럽으로 건너가 공부하였다.
유럽생활은 그에게 자유, 정의, 기본권 등 선진적인 시민의식의 체험과 함께 시민 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던
인물들의 사상을 통해 남미대륙의 현실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수엘라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곧 민족주의 해방 전쟁에 뛰어들었다.
수차례의 패배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독립에 대한 당위성과 구체적인 방법 등을 제시하며 끊임없이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19년 각고의 노력 끝에 뉴 그라나다(현 콜롬비아)를 필두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해방시켜 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였으며 이어 1824년 페루를 해방시켰고,
1825년 볼리비아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대 콜롬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끝을 맺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투쟁에 몸담았고 라틴아메리카의 헌법을 기초했으며 하나의 통합된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볼리바르였지만 결국 통합을 원치 안는 열강들의
분열정책과 내부의 적들에게 환멸을 느끼며 병상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1889년 그의 이상은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워싱턴 회의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으나
1826년 열린 에스파냐계 신생공화국의 유대를 목표로 한 파나마회의는 ‘범 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어 오늘날 까지 그의 이상을 이어오고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뒤마
프랑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난 뒤마(Alexandre Dumas, 1802.7.24~1870)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유족에게
주어지는 종신연금을 받지 못하여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세에 공증인 사무소에서 견습으로서 일하면서 ‘햄릿’에 매료된 그는 극작가를 목표로 파리로 떠났다.
아버지의 친구의 소개로 오를레앙공작(후에 프랑스 국왕이 된 루이 필립)가의 비서실에 근무하며
문학이나 역사 공부에 힘쓰는 한편 1829년부터 ‘앙리 3세와 그 궁정’과 같은 일련의 희극을 발표하며
성공해 인기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즈음 역사교사인 오귀스트 마케를 만난 뒤마는 역사소설에 관심을 두었고 당시 구독자를 늘리기 위한
신문사의 소설연재 유행과 맞물려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등 불후의 명작을 연제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다.
뒤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47년 역사극장을 열어 자신의 소설들을 연극으로 상연하며 생에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847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국왕의 지원이 끊기고
혼란기의 극장 경영의 어려움과 뒤마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1851년 파산하기에 이른다. 제기를 꿈꾸며 자신이 직접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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