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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와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기타방/우표여행

by 그린체 2010. 7. 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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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의 K-Stamp  에서 우표와 떠나는 시간여행으로

지나간 역사 공부도 되고 우표의 모습도 새기고 해서

이 우표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옮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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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1592년(선조 25)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는 왜군 수군에게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지금의 경남 통영시 앞바다인 한산만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좁고 긴 수로인 견내량을 지나 당시 무인도인 한산도 주변에 넓게 펼쳐진 만으로서 좁은 수로에서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적함들을 포위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당시 왜군은 연이은 해전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고

자 제1진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70여 척을 선두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 40여 척과 제3진의 가토 기요마사의 연합함대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사상 최대의 연합함대를 동원한 왜군은 자만심에 도취되어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었다. 당시 주변지형과 해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적정에 대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대비한 조선수군에게 왜장 와키사카의 제1진 70여척이 달려들었고, 미리 파놓은 함정에 휘말려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무장한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게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해전으로 격침된 일본 함선은 66척이었고,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서 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

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 간을 무인도에 표류하여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불리는 이날 해전으로 일본 수군의 주력은 거의 전멸하였으며,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에 제동이 걸리며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확실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
경부고속도로 개통

내용시작1970년 국가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완공 개통되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사업 중의 하나로 1968년 2월 1일에 착공되어 연장 428km, 폭 22.4m의 4차선으로 7월 7일 전 구간이 개통된 것이다.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국가경제의 2대핵심인 한강유역 및 낙동강유역 경제권을 직결하고 해운의 양대 관문인 인천 및 부산항을 두 끝으로 서울, 대전, 대구 등의 5개 도시를 연결하는 국가 기간선인 서

울-부산간의 최단거리 자동차전용도로이다. 이 고속도로는 서울-오산, 오산-대전, 대전-대구 및 대구-부산 간의 4개공구(工區)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장 난공사 공구인 대전-대구 구간을 마지막으로 준공을 보게 된 것이다.
개통당시 18개의 인터체인지, 100m 이상의 장대교만 29개소, 터널 6개소 등으로 되어 있으며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묶으며 국가산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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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업가 록펠러

내용시작뉴욕주 출생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7.8~1937.5.23)는 1859년 친구와 함께 상사회사(商事會社)를 설립하고, 1863년 부업으로 클리블랜드에 정유소(精油所)를 설립해 커가란 이문을 남기며 1870년 자본금 100만 달러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춘 오하이오스탠더드석유회사가 설립하였다. 사장으로 취임한 록펠러는 수완을 발휘해 급속히 사업을 확대하여 나갔으며 1882년에는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를 조직하였다. 1899년 오하이오의 주재판소로부터 셔먼독

점금지법(반트러스트법) 위반의 판결을 받자 뉴저지주(州)에 지주회사를 설립해 세계적인 석유회사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다시 한 번 반(反)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회사가 해체되자 록펠러는 재계에서 물러나 자선사업가로 변신하였다. 1890~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과 운영을 위해 4억 달러 이상을 기부하였고, 록펠러재단(1913년 설립),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는 등 여생을 자선사업에 몰두하였다.

미국의 사업가 록펠러

 
 
 
프랑스 파리 지하철 개통

내용시작1863년 런던에서 최초의 지하철도가 개통된 뒤 1896년 부다페스트, 1898년 빈에 이어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파리지하철 1호가 7월 10일 오후 1시 개통됐다. 최초의 런던 지하철도는 증기로 운행되었으나 1890년부터 전기의 힘을 이용하게 되었고 파리의 지하철 역시 전기를 동력으로 운행되었다.
파리 서쪽 포트 마이요에서 시작해

총 16개의 정차역을 지나 동쪽의 포트 드 반센누를 연결하는 파리지하철 1호는 3량의 객차로 약 30여 분간 파리의 시민들을 지하세계로 안내하였다. 오늘날 파리의 지하철은 메트로(Metro)라 불리며 거미줄 같은 교통망으로 파리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파리 지하철 개통

 
 
7월 11일은 세계인구의 날

내용시작1987년 국제연합은 세계인구 50억명 돌파를 기념하여 매년 7월 11일을 세계인구의 날로 지정하였다. 1900년 불과 15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1세기가 지난 오늘날 60억 명을 넘어 70억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날로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인류는 식량, 물, 자원 등의 고갈로 점차 심각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음을 직시하여 국제적인 대비를 하고자 인구의 날을 제정하였다. 현재 지구상에는 분당 148명꼴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2050년 세계 인구는 89억으로 예상하고 있다.

7월 11일은 세계인구의 날

 
 

수영복 패션의 핵폭탄, 비키니 수영복 등장

내용시작1946년 7월 1일, 미국은 태평양 마셜제도에 속한 산호초 비키니에 기자단을 불러 놓고 공개 핵실험을 가졌다.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폭탄과 같은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아름답던 바다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나흘 뒤인 7월 5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충만하

던 프랑스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도 관중의 넋을 잃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유인즉, 파리 모리토르 수영장에서 열린 수영복 대회에서 자동차 기술자 출신의 루이 레아드(1897-1984)가 만든 수영복 때문이었다.
모델이 남자 손수건 절반만한 크기의 천으로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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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나온 것.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다리를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외설이라 생각되던 시기였던 터라, 아무리 수영복이라도 배꼽과 허벅지가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비키니 수영복의 모델이 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키니를 만든 레아드는 카바레 스트립 댄서인 미셸 베르나르디니를 기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방송매체는 그럭저럭 괜찮은 평을

내놨지만, 반대 여론은 직선적이었다. 바티칸은 '부도덕'하다고 비난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은 법적으로 비키니를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
구 소련은 '퇴폐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샘플'이라고 매도했다. 며칠 전의 핵실험 장면을 떠올린 디자이너 루이 레아드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이고 상표로 등록했다.
비키니 수영복은 시대적 상황에 의

해 처음부터 성공적 인 출발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1960년대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비키니를 입고, 브라이너 헤이랜드가 비키니를 주제로 부른 노래가 히트되면서 대중화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는 1961년에 (주)한국샤크라인의 전신인 백화사가 상어표 수영복이란 브랜드로 수영복 시장이 열렸다.

 

 

정치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체트킨

내용시작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7.5~1933.6.20).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사상적으로는 당내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좌익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주로 문화운동과 여성운동에 종사하였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1892~1916년 사회민주당의 여성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편집하였다.
또한 1907년 최초로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를 개최하여 반전(反戰)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체트킨

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하고, 1918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창설자로 1919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24년 레닌 사망 후, 그녀의 영향력은 대폭 줄어들었으나, 1932년 8월 나치스(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가 제1당이 된 국회에서 최연

장 의원으로서 임시의장이 되어 230명의 나치스 의원단 앞에서 반(反)파쇼통일전선의 결성을 호소한 일은 유명하다.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 백범 김구

내용시작황해도 해주 출신인 김구는 18세에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갑오동학란 때는 해주 동학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3ㆍ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 경무국장, 내무국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으며 광복군을 조직, 조국의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항쟁을 전개하

였다. 8ㆍ15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한 그는 민주의원 총리, 비상국민대회회장, 한국독립당 당수로 있으면서 통일 자주독립노선을 지향하여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남ㆍ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오다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狡葬)에서 암살당하였다. 평생을 민족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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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한 백범 김구선생은 독립운동가나 정치가였다는 것 보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김구선생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3월1일 대한민

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영국의 공군 원수 테더

내용시작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에서 효과적인 지원으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영국의 공군원수 테더(Arthur William Tedder, 1890.7.11~1967). 1913년 영국군에 입대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극동지역 공군 사령관을 거쳐 1941년 중동지역 공군 사령관으로 지내며 아프리카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연합국의 모든 공군 작전 지휘권을 가진 테더는 적의 보급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통신시설 폭격과 더불어 아군 지상군으로 하여금 다양한 전술이 가능하도록 근접지원을 함으로써 전장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42년 기사작위를 수여받은 테더는 1944년 연합군 부사령관으로서 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장군과 함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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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설치령 공포

내용시작유네스코란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약자로 1946년 창설된 국제연합 전문기구로서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교육·과학·문화 부문의 국제협력을 도모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은 1950년 6월 14일 제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51년 11월 10일 '유네스코 헌장 준수서약 동의요청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953년 7월 6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설치령이 대통령령 제801호로 공포되었으며 이듬해 1월 30일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창립총회가 소집되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국내외의 교육·과학·문화·홍보부문에 관한 연락 및 정보교환을 통하여 이 부문들의 사업에 협조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활동에 관한 국제협약 체결문제에 대해서 대정부 자문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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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의 대가 샤갈

내용시작러시아 비테프스크 태생의 프랑스 화가 샤갈(Marc Chagall, 1887.7.7~1985.3.28)은 이론보다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유화, 판화, 벽화, 스테인드 글라스, 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중기 이후 샤갈은 점차 슬

표현주의의 대가 샤갈

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

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

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르간 제작자 슈니트거

내용시작교회의 한쪽 벽면을 장식하며 장엄한 미사곡을 연주하는 대형 파이프 오르간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엄숙하고 웅장한 외형에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투명하고 명료한 소리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장인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8세기 무렵부터 교회음악에 사용되기 시작한 오르간은 14세기에 들어 점차 대형화되며 16세기를 거쳐 17~18세기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아하게 된다. 오늘날 서구의

오르간 제작자 슈니트거

대형 교회를 장식하는 파이프 오르간들은 대부분 이 시기의 것으로서 슈니트거(Arp Schnitger 1648. 7. 9~1719)는 동시대 최고의 오르간 제작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가 만든

명기들은 부크스테후데, 파헬벨, 바흐 등 오르간음악 거장의 손을 거치며 바로크시대의 교회음악을 이끌었다. 생전 150여대의 크고 작은 오르간을 만들었던 슈니트거는

목수 가문에서 태어나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2명은 유명한 오르간 제작자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

내용시작형이상학적이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피투라 메타피시카'(pittura metafisica) 화풍을 창시하며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7.10~1978). 그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중의 한 사람으로서 미래파 이후의 이탈리아 화단의 중심에 있었다. 독일의 뮌헨 미술 아카데미시절 형이상학적 회화에 눈뜨기 시작한 키리코는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부터 파리에 머무는 동안 피카소 등과 교류하며 입체파로의 시각을 넓

혔던 키리코는 이후 연관성 없는 대상물을 주관적으로 끼워 맞춰 재구성하여 몽환적인 분위기의 독특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그 영향력을 점차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1918년 로마로 이주하여 자신의 첫 개인전시회 열며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키리코는 시공을 초월한 환상적인 분위기와 절대적인 적막감을 통해 초현실주의의 태동을 알렸고 이후 달리,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를 비롯한 후대의 초현실주의 대가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

 
 
스웨덴 新낭만주의의 새바람, 헤이덴스탐

내용시작스웨덴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이덴스탐(Carl Gustaf Verner von Heidenstam, 1859.7.6~1940.5.20)은 음울한 자연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북유럽 문단에 신(新)낭만주의의 새 바람을 불어 넣었던 인물로 평가 받는다. 건강상의 이유로 젊

은 시절의 대부분을 남유럽 및 지중해 등에서 요양과 유람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인 '성지순례와 방황의 세월, Vallfart och vandringsår(1888)'은 유람시절에 체험한 우화 및 동양철학이 수록된 작품으로 대중들의 인기몰이

스웨덴 新낭만주의의 새바람, 헤이덴스탐

에 성공하였다. 초기의 탐미주의적 시풍은 점차 고전적 이상주의로 발전하여 스웨덴 거장으로 대성하였고, 19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스웨덴의 자연주의 운동에 반

발하여 환상, 아름다움, 국민적 주제 등을 다루는 문학의 부흥을 요구하였던 그는 수필 ‘르네상스, Renässans(1889)’, 시집 ‘시, Dikter(1895)’, ‘신 시집, Nya dikter(191

5)’등을 비롯하여 '칼왕의 군병들, Karolinerna(2권, 1897∼1898)'등의 역사소설도 집필하였다.

 

 

과학
 
 
프랑스 발명가 자카르

내용시작리옹 출생의 발명가 자카르(Joseph Marie Jacquard, 1752.7.7~1834.8.7)는 활자주조소의 도제(徒弟)로 일하다가, 정교한 무늬를 짜내는 문직기(紋織機) 개량에 뜻을 두게 되었다. 1790년 직조기 개발을 시작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연구를 잠시 중단하고 혁명군에 가담하여 리옹의 방어전투에 참가했다. 1801년 만국박람회에 개량형 드로룸(drawloom)을 선보여 동메달을 받은 자카르는 연구를 계

속하여 1805년 직조기를 자카르 직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부품을 개발했다. 1806년 이 직조기는 공공소유로 선언되었고 그는 연금과 각 기계에 대한 특허권 사용료를 받는 등 국가로부터 많은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비단직공들 사이에서는 이 기계의 도입으로 인한 실업의 두려움 때문에 그에 대한 많은 적대감이 생겼으며, 리옹에서는 직공들이 생산중인 기계를 불태우는 시위가 일기도 하였다.

프랑스 발명가 자카르

재봉틀발명가 하우

내용시작옷을 만들거나 수선할 때 필수적인 기계인 재봉틀은 미국의 발명가 하우(Elias Howe, 1819.7.9~1867)에 의해 최초로 실용화 되었다. 재봉기의 역사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90년경 영국의 T.세인트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졌으며 1825년에는 프랑스인 시몽에 의해 특허가 출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재봉기는 원시적인 수준의 것으로서 1846년에 이르러서야 하우에 의해 산업현장에서 사용하기

에 적합한 실용적인 재봉기가 발명된 것이다. 특허를 취득한 하우는 유럽시장에 진출하여 막대한 부를 얻었으며 국내에서는 자신의 특허를 도용한 I.M.싱어 등과의 소송에서 승소하여 하루 4천 달러의 특허사용료를 받는 성공한 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이후 재봉기는 공업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현재까지 약 5천여 종이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재봉틀발명가 하우

 
 
금주의 노벨상

[노벨생리·의학상] 호흡효소 연구에 두각을 보인 스웨덴의 생화학자 테오렐

호흡효소 연구에 두각을 보인 스웨덴의 생화학자 테오렐 내용시작살아 있는 세포에서 산화반응을 촉진하는 효소에 관한 연구로 효소작용을 이해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스웨덴의 생화학자 테오렐(Axel Hugo Theodor Theorell, 1903.7.6~1982.8.16)은 왕립(王立) 카롤린스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35~1936년 웁살라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였다. 1937년 노벨 의학연구소 생화학부장이 되었고, 1959년부터는 카롤린스카의과대학 교수를 겸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플라빈 효소를 처음으로 순수 분리하였고, 후에 이것이 단백질 부분(아포효소)과 보조효소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근육으로부터 미오글로빈을 정제하는 데에도 성공하였고, 산화환원효소에 관하여 연구를 하였다. 1955년에 호흡효소의 연구 즉, 생물체가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영양물질을 이용하는 과정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노벨물리학상] 자기학과 저온물리학의 대가

자기학과 저온물리학의 대가 내용시작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물리학자 카피차(Pyotr Leonidovich Kapitsa, 1894.7.8~1984.4.8)는 자기학과 저온물리학에 대한 연구로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2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929년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특별히 그를 위해 케임브리지에 왕립학회 몬드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헬륨을 액화시키는 팽창기관에 대한 그의 논문을 출판하기 전인 1934년 그는 소련에서 열리는 물리학 회의에 참석하러 갔는데 거기서 여권이 압수되었고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억류되었다. 1935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러더퍼드의 중재를 통해 몬드연구소에 있던 기구들을 모스크바로 실어오게 했다. 그는 저온 물리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헬륨 Ⅱ의 열전도 특성을 연구하던 중 그것의 초유동성을 발견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강철 산업을 위해 액체 산소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1930, 1940년대에 그의 과학적인 업적에 대해 소련 정부는 사회노동당 영웅의 칭호(1945)와 소련 최고 시민상을 포함해 많은 명예를 얻기도 하였다. 1946년 그는 핵무기 개발에 관한 연구를 거절함으로써 스탈린의 미움을 샀고 물리문제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까지 시골집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벨평화상] 퍼그워시 성명

퍼그워시 성명 내용시작1957년 7월 캐나다의 작은 어촌에서는 핵전쟁의 위험에서 인류를 지키기 위한 일단의 과학자 모임이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22명의 핵물리학자들이 모여 국제사회에 대한 방사능의 치명적인 위험을 환기시키고 핵실험을 중지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1955년 아인슈타인과 러셀이 핵전쟁의 위험과 전쟁회피 호소하며 발표한 ‘러셀아인슈타인성명’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진 이 국제적인 모임은, 이후 여러 국가를 순회하며 세계문제에 대한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검토하는 한편, 무기통제와 군비감축에 관한 수많은 보고서의 발간을 통해 화학무기금지조약,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등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과학자들의 자발적인 참여해 이루어진 이 회의는 1995년엔 설립자 중 한 명인 조지프 로트블랫 박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하였다.

 

 

온라인미술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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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주는 그의 작풍은 오히려 모네나 시슬레보다 구성적인 면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천성이 성실한 화가였던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7.10~1903)는 1855년 만국박람회 이후 풍경화에 몰입하며 열심히 정진하였다. 천부적인 소질보다 노력파에 가까웠던 피사로는 보불전쟁당시 피난 생활 속에서 모네와의 만남 이후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주로 소박한 전원풍경을 그리며 인상주의의 목표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던 피사로는 만년에 심한 눈병에도 불구하고 생에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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