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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술 고양 막걸리

요리 이야기/식재료3

by 그린체 2016. 10. 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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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막걸리 통일의 술 고양 막걸리는 통일 막걸리, 박정희 막걸리, 김정일 막걸리 등으로 불린다.<br>막걸리 한 잔에 한국 근대사의 비극과 한국인의 염원이 뒤섞여 있다. 텁텁하고 찌릿하다.

술은 대체로 곡물에서 얻는 것과 과일에서 얻는 것 두 종류가 있다.

한반도의 술은 대부분 곡물에서 얻는다.

한반도의 과일은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기에는 당도가 낮기 때문이다.

곡물을 익혀 누룩과 물을 더하면 곡물의 전분이 당으로 변하고,

이 당을 먹이로 하여 미생물이 증식을 하게 되는데,

이를 알코올 발효라 하며, 그 발효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술이다.

이 곡물의 술에 용수를 박아 맑은 술만 뜬 것이 청주()이다.

청주는 흔히 약주()라고도 부른다.

이 청주를 소주고리에 넣고 불을 지펴 증류를 하면 소주()가 된다.

막걸리는 발효된 곡물의 술을 체에 내려 목으로 넘기기에 거북한 거친 것들만 걸러낸 술이다.

따라서 곡물의 고운 알갱이가 막걸리에 들어 있어 불투명하고, 그래서 탁주()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막걸리는 곡물의 술 중에 가장 원초적인 상태에 있다 할 것이다.




막걸리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술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그다지 많이 마시는 술은 아니다. 그 가격이 무지 싼데도 그렇다.

  

농민의 술

막걸리는 그 기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한반도 사람들이 마셨다.

쌀, 찹쌀, 보리, 밀, 귀리, 조 등등으로 막걸리를 빚었다.

막걸리에 용수를 박아 청주로 뜨면 깔끔한 맛은 있으나 그 양은 퍽 준다. 청주는 귀한 술이었다.

한반도는 단군 이래 1960년대까지 그 집권 세력이 어떠하였든 '농민의 나라'였고,

따라서 청주를 마실 만큼 넉넉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몽골로부터 소주 증류법이 유입되었는데. 이 소주 역시 일부 지배층의 술이었다.

막걸리는 수천 년간 한반도의 주인이었던 농민들이 마신 술이며, 그래서 막걸리를 농주()라고도 한다.

조선에서는 왕이 늘 금주령을 내렸다. 먹을 곡식도 부족하니 술을 못 담그게 한 것이다.

그래도 집집이 술을 담가 마셨다. 강력한 종교적 금기로나 인간의 알코올에 대한 집착을 줄일 수 있지

정치적인 금주는 인간의 역사에 늘 실패하였고,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술 빚는 일은 허가제로 바뀌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재래의 작은 양조장이 마을마다 있었는데, 그 수가 수만에 달하였다.

일제 초기에는 자가소비용 양조도 허가를 내주었으나 납세 술과

비납세 술이 뒤섞이자 곧 민간의 술 제조는 금지하였다.

1930년대 말에는 강제 통합작업을 벌여 전국에 4,000여 개소의 양조장이 남았다.

그 양조장들은 여러 술을 내었으나 막걸리가 주종이었다.

1931년 3월 6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경기도 고양군내 조선주 양조장이 36개소 있었다고 하며,

 이들 양조장의 연간 술 판매량은 소주 750석(), 약주 5,838석, 탁주 3만2,141석이었다.

(1석은 10말이며, 180리터이다.). 1석당 가격은 소주 50원, 약주 45원, 탁주 15원이었다.



사라졌던 쌀막걸리

광복 이후 한국 정부는 일제의 양조 정책을 유지하였다.

가정의 술 제조는 여전히 금지하였지만 일제만큼 강력히 단속하지는 않았다.

서구화와 함께 맥주와 양주가 시장을 꾸준히 넓혔으나 1960년대 말까지 한국인의 술은 여전히 막걸리였다.

그 시기까지 전체 술 시장에서 막걸리는 80% 이상의 점유율을 유지하였다.

1970년대에 한국의 술 시장은 급변하였다. 맥주와 희석식 소주가 시장을 급속히 넓혀나갔다.

막걸리가 밀려나고 맥주와 소주가 득세를 하는 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시화였다.

농민은 도시로 이동을 하여 노동자가 되면서 막걸리를 버리고 맥주와 소주를 선택한 것이다.

쌀막걸리 제조 금지도 막걸리의 쇠퇴에 일부 영향을 주었다.

정부는 1963년에 쌀로는 막걸리를 빚지 못하게 하였다. 쌀이 부족하니 내린 조치였다.

대신에 수입 밀이나 옥수수 등으로 막걸리를 제조하게 하였다.

1977년 통일벼 재배로 대풍을 이루자 쌀막걸리를 허용하였다가 2년 뒤 다시 금지하였다.

쌀막걸리 제조가 다시 허용된 것은 1990년이었다. 그 사이에 막걸리는 '서민의 술' 또는

농민의 술'이라는 이미지는 희박해지고 '저급한 싸구려 술'이 되고 말았다.

쌀막걸리의 재등장에도 막걸리의 쇠퇴는 이어져 2000년대 초반 술 시장 점유율은 4~5%로 떨어졌다.

2000년대 후반, 막걸리 붐이 일었다.

일본인들이 막걸리를 즐겨 마신다는 언론 보도가 있자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생긴 것이다.

그 덕에 2011년 현재 막걸리 점유율은 12%대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막걸리 붐의 혜택은 자본이 넉넉한 대형 양조장의 몫이 되었고,

지역의 소규모 양조장은 오히려 지역 시장에까지 밀고들어온 대형 양조장의 막걸리와

힘겨운 싸움을 하는 꼴이 되었다. 2012년 현재 전국의 막걸리 양조장은 500여 곳에 이른다.




고양탁주합동제조장의 발효실이다. 막걸리가 잘 익게 저어주고 있다.

발효실 안에는 막걸리 냄새가 가득하여 그 냄새만으로 취기가 오른다.

고양 막걸리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마시던 술이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청와대에 가져갔다고 한다.

배다리술박물관에 있는 박정희 전시물이다.




대통령의 술

경기 고양시는 1990년대 서울의 위성도시로 개발되기 전에는 넓은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한강 하류의 땅은 비옥하여 벼농사가 잘되었고 쌀이 맛있기로 유명하였다.

1906년에 놓인 경의선으로 교통 사정도 좋았다.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 때부터 양조장이 여럿 있었다.

몇 차례의 강제적 통합 작업을 거쳐 1974년 고양에 있던 5개의 양조장이 최종적으로 고양탁주합동제조장으로 엮여졌다.

통합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양조장 역사의 가닥을 찾자면 1915년 주교동에서 개업한 인근상회이다.

이 인근상회 개업주의 4대손인 박관원 옹이 이 합동제조장의 대표로 있으며 배다리술박물관 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32년생인 박관원 관장은 한국 막걸리 역사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합동제조장의 막걸리 중 박 관장이 특별히 관리하는 막걸리는 배다리 막걸리라는 이름으로 팔린다.


고양 막걸리는 배다리 막걸리 외에 '통일 막걸리'라는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한국 근대사의 몇몇 장면과 겹쳐져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막걸리를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6년 원당동에 있는 한양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친 후 삼송리에 있는 실비옥에서 막걸리를 마셨는데,

그게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이후 고양 막걸리는 청와대에 납품이 되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지역의 경찰이 지프에 막걸리를 싣고 청와대에 가져갔다.

이 인연은 길게 이어져 1979년 10·26 그날 궁정동의 만찬 식탁 위에도 이 고양 막걸리가 놓여 있었다.

1999년 현대의 고 정주영 회장이 북한을 방북하였는데, 고 김정일 위원장이 정 회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마시던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박 대통령이 즐겨 마시던 막걸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던 현대 관계자는 여러 양조장에 문의를 하였고,

10여 곳의 양조장이 "우리 술이 대통령의 술이다"고 주장하였다.

박 대통령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은 막걸리를 마셔 그 후보 막걸리가 난립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고정적으로 가져간 막걸리는 고양 막걸리이고, 그래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도

현대에서 보낸 이 막걸리를 맛보았으며, 그래서 통일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박정희, 정주영, 김정일은 모두 그 이름 앞에 '고'자가 붙었다.

사람은 가고 막걸리는 남았으며 통일은 아직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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