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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동네였던 흔적 수원 갈비

요리 이야기/식재료3

by 그린체 2016. 10. 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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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갈비 부자 동네였던 흔적 갈비는 한때 한국인에게 부의 상징이었다. 물이 퐁퐁 오르는 분수대가 있는 '가든'에서 갈비 정도 뜯어야 성공한 삶이었다.<br>한국인의 이 갈비 신화를 만드는 데 수원 갈비가 일조를 하였다.   


갈비의 사전적 뜻은 '소나 돼지, 닭 따위의 가슴통을 이루는 좌우 열두 개의 굽은 뼈와 살을 식용으로 이르는 말'이다.

갈비의 뼈는 동물의 주요 장기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 뼈에 살이 붙어 있는데,

우리는 이를 갈비라는 이름으로 먹는다. 그런데, 보통은 갈비라 하면 소갈비를 말한다.

또 그 소갈비의 구이를 특히 갈비라 칭한다. 갈비뼈를 7센티미터 정도 되게 잘라 살을 너붓너붓하게

발라 편 후 양념을 하여 구워 먹는 음식이다. 경기도 수원시에 이 갈비 내는 식당이 많고, 또 맛있다고 이름나 있다.



  

수원 갈비는 소금 양념을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다.

사진은 소금 양념의 갈비이다.

 



'부드러운 갈비'

고기는, 대체로 찌거나 삶기보다 구워야 맛있다. 쇠고기도 그렇다.

한반도의 조상들도 오래 전부터 소를 잡아 구워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옛날 농경시대의 쇠고기는 질겼을 것이다.

그때의 소는 일소였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늙었거나 발육이 빈약하거나 병든 소를 잡아 먹었을 것이니,

현재 한국인이 먹고 있는 곡물 사육 30개월령 소의 부드러운 고기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쇠고기가 얼마나 질겼는지 짐작할 수 있는 조선의 조리법이 있다.

1809년의 저작물인 [규합총서]에 나오는 설하멱 조리법이다. "쇠고기를 썰어서 편으로 만들고 이것을 두들겨

연하게 한 것을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기름장으로 조미해서 기름이 충분히 스며들면 숯불에 굽는데,

구운 것을 급히 물에 담갔다가 꺼내고 굽고 또는 물에 담그는 일을 세 번 되풀이하고 기름을 바른 후에 또 굽는다.

중간중간 물에 담그면서 굽는 것은 쇠고기가 질기기 때문이다.

바짝 구워 결대로 찢어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고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갈비는 이 질김이 다소 덜하다.

갈비에 붙은 살은 운동량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 기름도 적당히 붙어 있다. 그러니, 갈비에 대한

한국인의 특별난 기호는 먼 옛날에 이미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소갈비를 구워 먹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1890년대 책인 [시의전서]에 '가리구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살을 바르는 방법은 지금과 비슷해 보이며, 양념을 하여 구웠다.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조리서에도 소갈비구이가 나온다. 이 무렵에는 갈비는 흔해졌다.

일제가 조선우(한우를 그때는 조선우 또는 조선소라 하였다) 사육을 적극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자료를 보면,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싸다. 불고기, 냉면, 설렁탕 등의 쇠고기 음식이 크게 번창하였고,

이때에 갈비도 널리 팔렸다. 갈비 가격도 쌌다. 1930년 동아일보에 강릉 지역 음식 가격이 나오는데,

국밥, 떡국, 비빔밥이 15전씩이고 갈비는 5전이다.



수원은 부자 동네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한반도의 소는 군수용으로 쓰이면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축산 기반을 거의 잃었다.

1930년대 150만 마리에 이르던 소 사육 마릿수가 1950년대에는 50만 마리도 되지 않았다.

쇠고기는 다시 귀해졌다. 이때에 수원에서 갈비를 구워 파는 식당이 있었다.

수원 영동시장의 화춘옥이라는 식당이다.

1945년 개업할 당시에는 해장국(갈비우거지탕)을 팔았으며, 1956년에 갈비구이를 내놓았다.

그때에 화춘옥은 수원에서 유명하였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의 농업연구기관을 수시로 다니면서 이 화춘옥에 들렀다.

대통령이 먹는 갈비이니 이 수원의 갈비가 한반도에서 제일 맛있는 갈비가 되었고,

수원 갈비라는 명성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수원 갈비집들은 화춘옥의 명성에 기대어

문을 연 식당이라 할 수 있는데, 1970년대에 개업한 식당들이 많다.

그 당시, 수원에 화춘옥 같은 갈비집이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수원에 큰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흔히 말한다.

소가 많으니 쇠고기 먹는 일도 잦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물론 수원 우시장이 제법 큰 규모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쇠고기까지 흔하거나 쌌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소는 도축되고 발골, 정육 과정을 거친 후에나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수원에는 갈비를 먹을 수 있는 부자들이 많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수원은 한반도 남부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어 조선시대부터 큰 장이 섰고 돈 많은 상인이 많았다.

또, 1960년대 이전까지 한국은 농업사회였는데, 그 중심에 수원이 있었다.

농업연구기관이 수원에 있었고, 서울대 농대도 수원에 있었다. 한반도가 급속히 산업화하면서 수원이

주변부'로 밀려났지만, 한때 수원은 갈비를 넉넉하게 뜯을 수 있는 부자 동네였던 것이다.




갈비는 한때 한국인에게 성공과 부를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마블링 중심의 쇠고기 기호가 번지면서 그 자리를 등심에게 넘겨주었다.

수원 화성이다. 조선 후기의 성으로 아름다운 성벽을 가지고 있다.

이 성을 쌓을 때 동원된 소를 인부들이 잡아 먹으면서 수원 갈비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허황한 스토리도 떠돈다.




옛 갈비는 아니다

화춘옥의 갈비는 컸다. 뼈 길이가 17센티미터나 되었다. 살은 한쪽으로 발랐다. 양념은 소금간을 기본으로 하였다.

가게 앞에 커다란 화덕을 두었는데, 그 화덕에서 갈비를 구워 양재기에 담아 내었다. 손님은 그 갈비를 손에 들고 뜯었다.

비료 포대 찢은 종이를 따로 주었는데, 그 누런 종이로 갈비의 양옆을 잡고 먹었다.

1970년대 들어 수원에 여러 갈비집이 개업을 하였다. 서울의 강남 개발 바람이 불면서 수원 갈비집

요리사들이 강남의 '가든'으로 이직을 하였다. 이 시기에 갈비는 한국의 대표 외식 메뉴가 되었다.

그러면서 갈비에도 변화가 왔다. 식당 앞의 큰 화덕이 사라지고 손님 식탁 위에 숯불 또는 가스불이 올랐다.

갈비 길이가 7센티미터로 작아졌다. 살을 양옆으로 바르고 다이아몬드 모양의 칼집을 내는 방식이 유행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소금 양념법이 사라지고 간장 양념법이 일반화되었다.

1980년 화춘옥은 문을 닫았는데 2000년에 재개업했다가 다시 닫고, 2011년 또 다시 신화춘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어 영업을 하고 있다. 그 사이에 수원의 여러 갈비집들이 따로 명성을 쌓아 제각각의 이름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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