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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의 패션

교육에 관한 것/역사이야기

by 그린체 2017. 2. 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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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왕녀 <br />
덕혜옹주의 패션 이야기가 있는 우리 옷

덕혜는 고종과 고종의 세수간 나인이었던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의 신분이었으나

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조선왕실의 마지막 왕녀이다.

고종뿐만 아니라 순종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일제강점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누구보다도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였다.

조선 왕실의 상징적 희망이었던 옹주



덕혜옹주에 관한 사진자료는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 1931년 결혼을 한 이후부터 1962년 병든 몸으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사진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데 그나마 몇 장의 조선왕실 가족사진에서 어릴 적의 모습을 알 수 있으며,

일출심상소학교의 사진첩에서 학교 생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옹주는 조선왕실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존재였던 만큼 각 일간지에서 종종

옹주에 관한 기사와 함께 사진을 실어 다행히 옹주의 성장과정과 일상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덕혜옹주가 5살 되던 해 덕수궁에 황실유치원을 다니게 된다.

옹주를 포함한 10여명의 원생들은 모두 한복차림으로 다녔는데

당시의 사진을 보면 옹주는 5세로 가장 어렸으나 야무진 인상을 주고 있다.

흑백사진으로 옷의 색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저고리와 치마의 색상이 달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옹주가 궁궐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대부분 치마, 저고리와 당의 차림으로 전통복식을 착용하고 있는데

1921년 일출심상소학교 2학년 과정에 입학하면서부터 일본복식과 서양복식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아마도 궁 안에서는 한복을 입고 외출 시에는 일본복식이나 양장을 하였을 것이다.

일출심상소학교는 일본의 학습원과 같은 학교로 경성 부립으로 세워진 일본인 학교였다.

일출심상소학교에서는 일본복식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통학할 때에는 일본복식으로 갖추었는데

주로 몬츠키와 하카마를 착용하였다. 몬츠키는 소매나 등에 가문()을 표시하는 옷으로 몬후쿠라고도 하는데

덕혜옹주가 착용한 옷에는 소매에 오얏꽃 무늬가 있다. 오얏꽃 무늬()는 오얏 이()자에서 따온 무늬로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왕실의 상징 문장으로 삼았다.

그 무렵에 양장을 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머리를 길게 땋아 오른쪽으로 늘어뜨리고.

티어드스커트와 벨슬리브, 러플칼라가 달린 원피스에 클로슈를 깊이 눌러쓰고 있다.

클로슈는 프랑스어로 ‘종’이란 뜻으로 모자의 형태가 종과 비슷한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1920년대에 유행하던 모자이다.



몬츠키와 하카마를 착용한 덕혜옹주, 클로슈와 원피스 차림의 옹주



옹주는 1925년 영친왕에 이어 강제로 일본으로 향하여 학습원 여자 중등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 무렵에 찍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몇 장의 사진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십장생 그림의 병풍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은 궁궐 안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스란치마,

대란치마 위에 용보가 달린 당의를 입은 소례복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과 챙의 앞부분을 올린 모자를 쓰고

원피스를 입고 허리에는 커다란 꽃 장식이 있는 벨트를 하고 있으며 짙은 색 스타킹과

옥스포드화를 신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서양복식이 도입되면서 함께 들어온 옥스포드화는 남성뿐만 아니라 신여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던 구두였다.



소례복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 양장 차림의 덕혜옹주



덕혜옹주의 사진을 보면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고 있으나 실외에서는 거의 대부분 모자를 쓰고 있는데

학습원 교복을 입을 때에도 외부에서는 모자를 쓰고 있다.

학습원 후기 1년 재학 당시의 사진에서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커다란 리본으로 묶었으며 클로슈를 쓰고

허리를 강조하지 않는로 웨이스트 라인(low waistline) 원피스에 진주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단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린 나이이지만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여자학습원 후기 1년 재학 당시,  학습원 중기 4학년 시절의 모습



1927년 영친왕 부부는 유럽을 방문한다.

그 동안 덕혜옹주는 자택에 남아 학습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학습원 중기 4학년 시절의 모습을 보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묶고 클로슈를 쓰고 있으며 학습원의 유니폼인 세일러복을 입고 감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이듬해 영친왕부부가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영친왕비의 부모와 함께 고베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덕혜옹주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보이시 스타일(boyish style)인 짧게 자른 머리(bob cut)에

클로슈를 깊게 눌러 쓰고 로 웨이스트라인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이전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아마도 1927~1928년 사이에 머리를 잘랐으며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짧은 머리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베항에서 영친왕 부부를 마중하고 있는 일행.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덕혜옹주.

결혼식 사진



1931년 5월 8일 옹주는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을 한다.

결혼식은 순일본식으로 거행되었는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장미꽃 부케를 들고 있는 결혼식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결혼 이후의 사진으로는 부부가 대마도를 방문하여 함께 찍은 사진 이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아마 덕혜옹주의 병세와 전쟁 등으로 인해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덕혜옹주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져서 1946년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며 귀국할 때까지 16년 동안을

병원의 독방에서 지내다 1962년 1월 26일 마침내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날 옹주는 검은색 스커트와 자색 오바를 입고, 밤색 둥근 모자를 쓰고 중굽의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유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으니 아마 옷도 다른 사람이 입혀주었을 것이다.

귀국한 이후 5년동안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다 퇴원하여 낙선재에서 기거하게 된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77세로 영면하였다.

평탄치 못했던 일생으로 인해 ‘불운한 마지막 옹주’로 알려진 덕혜옹주. 그녀는 비록 몰락한 조선왕실의 왕녀였지만

복식은 최첨단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옷차림 안에 숨겨진 그녀의 고통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었을까.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는 덕혜옹주

덕혜옹주의 회갑날. 왼쪽에서 두 번째가 덕혜옹주



자료제공/ 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http://www.heritagechannel.tv   

글/ 박윤미 |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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