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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랑을 살아간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

교육에 관한 것/역사이야기

by 그린체 2016. 8. 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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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5월 25일, 황제의 자리에 물러나 있던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의 거처 덕수궁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1912~1989)가 태어난 것이다.

고종이 회갑을 맞던 해에 얻은 늦둥이 딸이었다




어머니는 소주방 나인 출신으로 고종의 후궁이 되었던 복녕당() 양씨.

덕혜옹주는 1907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를 당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에게 삶의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은 망국의 옹주에게 만만치 않은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고종의 늦둥이 딸로 태어나다



당시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 오늘날의 비서실) 일기에는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고 하여 덕혜옹주의 탄생과 함께 고

종이 직접 산모를 찾았음을 기록했다. 대개 초칠일이 지나야

산모를 찾는 관례에 비추어 보면 고종의 행동은 이례적이었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가 그만큼 귀여웠기 때문일 것이다.

덕혜의 출산 이후 고종은 늘 그녀와 함께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1916년 4월에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다.

준명당의 건물 바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홈이 파여 있는데,

아이들이 놀다가 행여 다칠까 봐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다.

딸을 위한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5월 16일 고종은 직접 유치원 입학식에 참석했다.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덕혜는 가마를 타고 등교했으며, 유모 변복동이 수행했다.

덕혜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아닌 아버지 고종과 함께 보냈기에,

아버지에 대한 정이 그만큼 깊었다. 고종에게 덕혜는 그야말로 쓸쓸한 말년에 찾아온 한줄기 빛이었다.




1918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순종비), 덕혜옹주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송두리째 바뀐 삶


그러나 두 부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것이다.

덕혜의 나이 이제 겨우 8살.

개인적인 슬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친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고종 승하 후 덕혜는 거처를 함녕전에서 어머니가 있는 광화당으로 옮겼다가,

고종의 혼전(殿)이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창덕궁 관물헌에 거처를 잡았다.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10살이 된 덕혜의 교육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덕혜에게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 했다.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도 그녀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다.

『순종실록』 1921년 5월 4일의 기록에 “복녕당 아기에게 덕혜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덕혜의 불운은 일본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영친왕(1897~1970)에게 그랬듯이 덕혜에게도 일본 유학을 강요했다.

일제의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했다.

14세의 어린 소녀는 정든 궁궐을 멀리 떠나 일본이라는 낯선 이국 땅에 발을 디뎠다.





이국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


1925년 3월 30일 덕혜가 동경에 도착해서 간 곳은

오빠인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이방자는 수기에 “덕혜옹주가 도착한 날 밤 그의 침대 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용히 잠든 앳된 얼굴에는 애수가 서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며

아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훗날 덕혜와 이방자는 40여 년 만에 낙선재에서 노년의 모습으로 재회를 하게 된다.

덕혜는 영친왕의 집에서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당시 덕혜는 늘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덕혜는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 무렵 덕혜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 양씨의 죽음이었다. 덕혜는 이국 땅에서 말 그대로 고아가 되었다.



순종의 이복동생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황태자비 이방자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생모 양씨의 장례식에서



★정략결혼의 비극적인 결과


1931년 5월 8일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에 크게 분노했다.

덕혜가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일제에 의한 정략결혼으로, 일본인 아내를 맞은 영친왕과 같은 운명을 밟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신랑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식 사진을 실어 분노한 민심을 대변했다.

당시 궁녀들 사이에서는 덕혜의 남편이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남편 소 다케유키는 훤칠한 미남이었으며,

동경대 영문학과를 나온 당대의 엘리트 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결혼 1년 후에는 딸 정혜()가 태어났고 덕혜는 얼마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결혼 직전의 덕혜옹주와 남편 소 다케유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딸 정혜는 1956년에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어 7년 뒤 사망처리되었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그러나 망국의 옹주로서 겪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던 탓일까?

덕혜는 결혼 후 조현병에 시달렸다.

남편은 집에서 간병을 하다가, 1946년 정신병원으로 덕혜를 옮겼다.

일제의 패망 후 소 다케유키는 더 이상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덕혜는 법적 보호자였던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남편과 이혼을 했다.

1956년 딸 정혜의 실종과 죽음은 덕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나라를 빼앗긴데다가, 부모도 일찍 잃고 남편에 이어 자식까지 떠나보낸 것이다.

망국의 옹주에게 다가온,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운명은

결국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졌다.



정신질환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다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덕혜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궐에 가기를 원했다.

이 무렵 서울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마침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

덕혜는 1962년 1월 26일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37년 만의 귀국이었다.

14세의 꽃다운 소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 여인으로,

그것도 풍상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돌아온 것이다.

당시 일간지에서는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산천이 낯선 외국으로 끌려간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결혼을 하게 되자 모든 것이 구슬프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심한 고민 끝에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그녀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덕혜는 귀국 후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가 1967년 무렵부터 말년을 보낸 거처는 낙선재()였다.



조선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 낙선재에서 삶을 마치다.


낙선재는 모두 세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

847년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공간으로,

헌종의 사랑채가 낙선재, 경빈 김씨의 거처인 안채가 석복헌(),

그리고 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해 중수한 건물이 수강재()다.




낙선재는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으며,

순종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인 1912년 6월부터 주로 이곳에서 거주했다.

이때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가 석복헌에서 거하다가, 1966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에 환국한 영친왕 이은()은 낙선재에서 1970년에 생을 마쳤다.

덕혜옹주는 귀국 후 수강재에서 머물렀다.

덕혜옹주가 돌아온 이듬해에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1901~1989)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는 귀국한 시누이 덕혜옹주를 낙선재에서 맞았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역사의 격랑 속에서 굴곡진 삶을 살다 간 덕혜옹주(1923년경)



조선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이방자와 덕혜옹주가

낙선재와 수강재에 함께 머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만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일 뒤인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다.



참고 자료

혼마 야스코, 이훈 옮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2008, 역사공간.

신명호, 『조선공주실록』, 2009, 역사의 아침.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 2016년 3월 20일 방송.


글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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