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여름철 냉국수 시리즈
평양식 냉면의 국수에는 메밀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거칠고, 쉽게 끊어지는 굵은 면발이 특징이다.
동국세시기에는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 섞은 것을 냉면이라 하며
잡채와 배, 밤, 쇠고기, 돼지고기 썬 것과 기름, 간장을 메밀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이라고 한다.
이 중 평양냉면이 최고다.'라고 쓰여 있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추운 겨울 따뜻한 온돌 아래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동치미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었는데, 맵거나 짜지 않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냉면육수는 꿩 삶은 국물을 으뜸으로 치며, 대개 사골국물이나 동치미국물을 사용했다.
평안도의 동치미는 추운 곳에서 좋은 무로 삼삼하게 담갔으니 땅에 묻어 익는 동안에 유기산이 적당하게 생성되어 별미다.
평양냉면은 추운 겨울날에 식사 또는 술을 먹고 난 후 해장국 대신으로 즐겨 먹었다.
선주후면'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아마 그때부터일 것이다. 때문에 평안도의 집집마다 에서는 국수틀을 마련해 놓았으며
일상적으로 차리는 음식상은 물론 특별히 차리는 잔칫상, 돌상에도 반드시 국수를 곁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 [조선닷컴]국수틀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부터 즐겨 먹은 음식으로 추측한다. 조선시대 학자 홍석모가 쓴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에는
'냉면은 11월 동짓날에 먹는 음식'이라고 나와 있다.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도 "냉면을 추운 겨울 뜨거운 온돌방에 앉아
이를 덜덜 떨어가며 먹었다"고 말한다. 반면 냉면이 여름 별식으로 자리 잡게 된 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냉장고가 도입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얼음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냉면을 여름에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후 625 전쟁 때 북쪽 피란민들이 남한에 정착하면서 냉면은 본격적인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조선닷컴]우래옥 냉면
↑ [조선닷컴]동국세시기
평양냉면이 역사를 찾아서
평양냉면은 나름 그 계보가 있다. 필동면옥, 을지면옥, 본가평양면옥으로 이어지는 의정부 평양면옥과
논현동 평양면옥, 분당 평양면옥으로 이어지는 장충동 평양면옥, 그리고 이보다 덜 알려졌지만
고덕동 평안도 오부자, 삼성동, 분당의 평가옥, 목동 평미가도 한 축을 담당한다.
가장 오래된 우래옥 역시 빠질 수 없으며 진한 고기육수의 을밀대 역시 평양냉면의 대표집이다.
이 중 의정부 평양면옥은 냉면 애호가들에게 가장 평양식 시골맛을 잘 살린 맛의 원조집으로 평가를 받는 곳이다.
이북 출신의 창업자 김경필 할머니가 연천 전곡에서 1969년 자제분들과 함께 평양냉면집을 개업한 이래
어느새 40년의 시간이 흘렀다. 1남 4녀 중 의정부 평양면옥은 장남인 홍진권씨가 나머지 세 명의 딸들이
을지면옥, 필동면옥, 평양면옥, 본가평양면옥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육향(肉香)이 강한 삼도갈비, 봉피양 등 고깃집 계열의 평양냉면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가 냉면을 먹듯이 국수를 일부러 차갑게 만들어 먹는 나라는 드물다.
일본에도 메밀국수인 냉(冷)소바가 있지만 우리 냉면처럼 차갑지는 않고 중국의 량몐(凉麵)은
찬 것이 아니라 뜨겁지 않을 뿐이다.냉면은 이렇게 세계적으로 독특한 음식이고 한국인 대부분이 좋아하는
전통 국수지만 유래를 알고 보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냉면의 기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먼저 차가운 국수라는 뜻의 냉면(冷麵)이 문헌에 나오는 시기는 조선 중엽이다.
17세기 초, 인조 때 활동한 장유의 계곡집(谿谷集)에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인다. '
자줏빛 육수의 냉면'이라는 시에서 냉면을 먹으며 '독특한 맛(異味)'이라고 표현했다.
시 한 편을 놓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독특하다는 표현과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이는 것을 보면
조선 중기에는 냉면이 그렇게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전에도 차가운 국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냉도(冷淘)라는 음식이 보이는데 고려 말 이색은 '
냉도를 먹으니 시원하다'는 시를 읊었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 '고려 환관들이 유두절이면
더위를 피해 머리를 감고 수단(水團)을 먹으며 냉도와 비슷한 맛이라고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냉도는 중국에서 먹는 찬 밀가루국수다. 고려 환관들이 수단과 비슷한 맛이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먹었다는 냉도는 차가운 밀국수나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문헌에 냉면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이후부터다.
다산 정약용은 면발이 긴 냉면에다 김치인 숭저를 곁들여 먹는다고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유득공은 서경잡절(西京雜絶)에서 가을이면 평양의 냉면 값이 오른다고 적었다.
평양냉면은 조선 중기 이후 널리 보급되면서 바로 유명해진 모양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명물로 감홍로와 냉면, 그리고 비빔밥을 꼽았는데
감홍로는 계피와 생강을 꿀에 버무려 소주를 붓고 밀봉해 담그는 술이다.
40도가 넘는 독주로 평양에서 담근 것이 유명했다.
평양에서는 고기안주에 감홍로를 마신 후 취하면 냉면을 먹으며 속을 풀었다고 해서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생겼다.
지금도 술자리가 끝날 때 마지막으로 국수를 먹는 경우가 있는데 평양에서 냉면이 해장국 역할을 한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도 겨울철 계절음식으로는 메밀국수에 무와 배추김치를 넣고 돼지고기를 얹은 냉면을 먹는다고 소개했는데
그중에서도 관서(關西)지방의 국수가 제일 맛있다고 했으니 바로 평양냉면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평양냉면은 메밀을 주원료로 하지만 쫄깃한 맛을 더하기 위해 녹말가루를 섞어 반죽을 한다.
그렇지만 메밀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질기지 않고 잘 끊어진다. 이 때문에 비빔냉면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평양냉면이 물냉면의 형태로 발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조선닷컴]의정부 평양면옥 냉면
↑ [조선닷컴]아지노모도
↑ [조선닷컴]냉면기계
1920년대, 냉면 대중화의 시작
평양냉면, 해주냉면 다음으로 서울냉면을 손꼽을 만큼 이제는 서울냉면이 냉면 축에서 뻐젓하게 한몫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성냉면은 말하자면 평양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입 까다로운 서울사람들의 미각을 정복해보려고
평양냉면 장사들이 일류 기술자-냉면의 맛은 그 기술 여하에 달렸습니다-를 데리고 경성으로 진출하기 시작해서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굳은 지반을 쌓아놓았습니다. 여름 한철 더군다나 각 관청 회사의 점심시간이면은
냉면집 전화통에서는 불이 날 지경입니다." 1936년 7월23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냉면' 관련 기사의 첫 부분이다.
1930년대 중반, 서울의 냉면집들이 성업을 하고 있는 정황을 이 글은 생생하게 전해준다.
1920년대 말 서울 청계천 북쪽에는 40곳이 넘는 냉면집이 있었다.
낙원동의 평양냉면집과 부벽루, 광교와 수표교 사이의 백양루, 그리고 돈의동의 동양루 등이
모두 냉면 전문점으로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냉면집은 여느 음식점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단층짜리 냉면집 입구에 상호를 적은 간판이 붙은 것은 설렁탕집이나 추어탕집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간판 옆으로 긴 막대기를 하늘 높이 꽂아 두고, 그 끝에는 길게 늘어뜨린 종이다발이 흩날리도록 했다.
종이다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제면기의 구멍에서 막 빠져 나오는 메밀국수 타래를 닮았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던 당시의 종로. 전차에서 내려 북악산 쪽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이 종이다발이 금세 눈에 띄었다.
특히 한여름에는 창공에서 휘날리는 흰색의 종이다발이 식객들의 입맛을 유혹했다.
소설가 김량운은 1926년 '동광' 제8호에 소설 <냉면>을 발표했다.
한창 세계가 경제공황으로 인해 시민들의 생활도 어려웠던 시절, 신문사 기자인 순호는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8월에 줄어든 월급봉투를 들고 집을 향하다가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전차를 타고서 돼지편육과 채 썬 배쪽, 그리고 노란 겨자를 뿌린 수북한 냉면 한 그릇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전차는 벌써 종로2가로 진입했다. 그때 순호가 부리나케 내리겠다고 하면서 외친 말이 '정차'가 아니라 '냉면'이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랫목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평안북도 출신 백석 시인이 노래한 '국수'의 한 소절이다.
고기를 삶아 우려낸 육수에 투박하게 뽑은 메밀 면을 넣고 삶은 고기와 지단을 고명으로 올린 담백한 평양냉면.
아마 면식(麵食)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절대적인 음식일 것이다. 처음 먹었을 땐 밍밍하고 싱겁게 느껴지지만
몇 번 맛을 보고 난 후엔 자꾸 생각날 정도로 중독성 있다. 사실 평양냉면은 계절 상관없이 언제 먹어도
깊은 맛이 감동인 음식이지만, 아무래도 시원한 육수와 차진 메밀면을 즐기기엔 여름이 제격이다.
평양냉면에 대한 맛깔 나고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차이
사실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 냉면은 함흥냉면이다.
흔히 메밀보다 전분의 비중이 높아 다소 쫄깃한 면발에 새콤달콤한 양념을 곁들인 냉면이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는 면을 만드는 재료에 있다.
평양냉면은 메밀에 녹말을 섞어서 면발을 뽑지만 함흥냉면은 메밀이 아닌 감자녹말로 국수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은 약간 거칠면서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고 감자녹말로 만드는 함흥냉면은
쇠심줄보다 질기고 오들오들한 맛이 매력이다. 그러나 겨울철에 먹는 음식인 냉면은 본래 메밀로 만들어야 제격이다.
그러나 함경도에서만 감자녹말로 국수를 만들어 독특한 맛의 함흥냉면으로 발전시켰는데 이는 메밀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이 깊고 지형이 험해 메밀조차 재배가 힘들었다는 것이 함경도 출신 어르신들의 증언이다.
대신 상대적으로 풍부한 감자로 국수를 뽑았는데 한반도에서 최초로 감자를 재배한 곳이 함경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1824년과 1825년인 순조 갑신년과
을유년 사이에 만주의 심마니들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 땅에 감자를 심었다고 적었다.
남미가 원산지인 감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최초의 기록이다.
또 함경도 회령군 수성천에 사는 사람들은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는다고 했으니 함경도에서부터 감자가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메밀이 아닌 감자녹말로 만드는 함흥냉면은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냉면이 아니다.
본고장인 함경도에서도 냉면이라는 말 대신에 감자녹말국수 또는 농마국수라고 불렀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농마국수라고 하지 함흥냉면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은 광복 이후 또는 625전쟁 이후 남한에서 평양냉면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그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함흥냉면이라는 말이 생겼다. 함흥냉면의 또 다른 특징은 회냉면이다.
냉면에 홍어회나 가자미식해 또는 명태식해를 얹어 비벼 먹는 것인데 이런 회냉면 역시 함경도에서도 1
910년 전후에 등장했다고 하니까 비교적 역사가 짧은 편이다.
따지고 보면 함흥냉면 자체가 그다지 역사가 깊은 음식이 아닐 수 있다. 더러는 실체가 없는 음식이라고도 한다.
초기의 냉면(나무 국수틀로 내리던 냉면)은 면발이 굵고 질기며 그 맛이 자극적인 것이 특징이었으나
점차 부드러운 맛을 선호하는 대중의 기호에 따라 자극적인 맛이 순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기계냉면이 출현하면서부터
면발에 양념을 첨가하는 것이 쉬워져 냉면 맛이 점차 부드럽고 개운한 쪽으로 변해왔다고 한다.
또한 원래 냉면의 맛은 1월부터 5월 사이 겨울을 지나 여름이 오기 전 까지가 가장 좋으며
여름이 가장 맛을 느끼기 힘들고 말복을 지나면서 찬바람이 난 이후에야 비로소 제 맛이 난다고는 하지만
시원함을 즐기는 기호에 따라 주로 여름철에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동치미가 잘 익을 무렵인 한겨울의 별식으로 냉면을 즐겼지만
현대에는 한여름에 차갑게 더위를 쫒는 음식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뜨거운 아랫목에 앉아 먹는 차가운 별미別味 냉면
하지만 냉면은 본래 겨울음식이었다. 앞의 매일신보 냉면 기사의 마지막에도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여름철 냉면은 시원한 맛에 많이들 먹지만은 그러나 정말 냉면다운 맛을 보려면 겨울냉면이 제일입니다.
시원한 동침이 국물에도 말은 동침이 냉면이야말로 한번 먹으면 인이 배이고 마는 기막힌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찬 냉면 맛도 별맛이려니와 냉면 뒤의 구수한 더운 국수물 맛도 또한 각별한 것입니다."
평안도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이정섭은 자신이 외국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생각난 음식으로 김치,
갈비구이와 함께 냉면을 꼽았다. "동지섣달 추운 날에 백설이 펄펄 흩날릴 때에 온돌에다 불을 따뜻하게 때고
3~4명의 우인이 서로 앉아서 갈비 구어 먹는 것이라든지 냉면 추렴을 하는 것도 퍽 그리웠다."
('별건곤' 1928년 5월) 밖에는 눈이 내리고, 방안의 온돌은 지글지글 끓을 정도로 뜨겁고,
그곳에서 이가 시린 냉면을 먹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겨울에 냉면을 먹는 풍속은 이미 조선후기에도 평안도나 황해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정약용(1762~1836)도 겨울에 그곳 사람들이 냉면 먹는 모습을 두고, "시월 들어 서관(西關)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문에 이중으로 휘장을 치고 폭신한 담요를 바닥에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쟁개비에 노루고기 저며 굽고, 길게 뽑은 냉면에 배추절임을 곁들이네"라고 시를 읊조렸다.
당시의 냉면 정체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홍석모(1781~1857)가 쓴 <동국세시기>의 음력 11월편에도 나온다. "
메밀국수에 무절임과 배추절임, 그리고 돼지고기를 넣은 음식을 냉면이라고 부른다.
또 잡채(雜菜)와 배, 밤, 채 썬 쇠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참기름과 간장을 모두 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骨董麵)이라고 부른다. 관서(關西)의 면이 가장 맛있다."
그런데 1920년대가 되면 사람들은 냉면을 여름음식으로 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냉면의 변신에는
근대적인 제빙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공 얼음을 만드는 제빙기술은 1875년에 독일인 린데와
미국인 보일이 암모니아 압축식 냉동기를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1910년 부산에도 제빙공장이 세워졌다.
연이어 제물포와 원산, 군산 등지에도 제빙공장이 문을 열었다. 본래 이들 제빙공장은 생선에 얼음을 채워서
오랫동안 유통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한여름에 얼음을 보자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얼음으로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 얼음이 냉면과 만나면서 여름냉면의 탄생을 가져왔다. 잡지 '별건곤' 제24호(1929년 12월)에는
평양의 여름냉면 맛을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대륙적 영향으로 여름날 열도(熱度)가 상당히 높은 평양에서
더위가 몹시 다툴 때 흰 '벌덕대접'에 주먹 같은 얼음덩어리를 속에 감추고 서리서리 얽힌 냉면!
얼음에 더위를 물리치고 겨자와 산미(酸味)에 권태를 떨쳐버리리!"
육향 짙은 육수에 100% 메밀면 말아 넣은 진짜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냉면 속에 든 얼음은 정말로 더위를 이기게 만들어줬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주로 겨울에 마련했던 동치미나 백김치, 혹은 나박김치를 여름에 담가야 육수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1910년대 말에 서울에 대리점을 개설했던 일본의 화학조미료 회사 아지노모도가 이 틈새를 놓칠 리 만무했다.
1931년 12월 17일 동아일보에는 '양념가루 아지노모도'의 광고가 실렸다. "냉면+아지노모도=미미(美味),
모든 음식+아지노모도=미미, 음식점+아지노모도=천객만래(千客萬來)"가 이 광고의 카피였다.
광고 속의 그림도 그들이 냉면집을 타깃으로 삼았음을 알게 해준다.
앞서도 소개했듯이 그림 속의 음식점 간판 옆에는 종이다발을 꽂은 장대가 높이 휘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지노모도사는 이미 1927년에 평양 대동문 근처에 냉면집을 직접 열었다.
본래 평양냉면의 육수는 동치미를 익히면서 삶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덩어리를 그 속에 넣어서 만들어냈다.
당연히 동물성 단백질의 아미노산 맛이 동치미 국물에 녹아드니 그 맛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맛을 아지노모도의 글루탐산이 대신하게 되었다. 냉면집 주인의 입장에서는 비록 아지노모도가 싸지는 않았지만, 그 편리성은 비싼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특히 한여름에 굳이 동치미를 담글 필요도 없게 만들어주었다.
손님의 입장에서도 심심한 동치미 육수에 비해 훨씬 자극적이면서 구수한 맛을 맛볼 수 있었다.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냉면은 겨울과 여름은 물론이고 봄이나 가을에도 먹는 음식이 되었다.
앞서 소개한 잡지 '별건곤' 제24호에서는 평양에서 먹는 봄과 가을의 냉면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봄에 먹는 냉면은 "봄바람이 건듯 불어 잠자든 모란대에 나무마다 잎 트고 가지마다 꽃 피는 3, 4월
긴 해를 춘흥에 겨워 즐기다가 지친 다리를 대동문 앞 드높은 2층루에 실어 놓고 패강(浿江)
푸른 물 따라 종일의 피로를 흘려보내며 가득 담은 한 그릇 냉면에 시장을 맞출 때!"라고 했다.
가을에 먹는 냉면은 "수년을 두고 그리든 지기를 패성(浿城)에 맞았다가 능라도 버들사이로 비쳐오는
달빛을 맞으며 흉금을 헤쳐 놓고 고회(古懷)를 이야기할 때 줄기줄기 긴 냉면이 물어 끊기 어려움이
그들의 우정을 말하는 듯할 때!"라고 적었다. 결국 1930년대 전국은 냉면 맛으로 '사시사철' 들썩였다.
그런데 문제는 냉면 수요에 맞추지 못하는 메밀국수 생산이었다.
알다시피 메밀은 밀가루와 달리 그 자체로 반죽이 차지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녹두녹말로 풀을 쑨 후
여기에 메밀가루를 넣고 반죽을 해야 한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메밀반죽을 국수로 만들기 위해서
조선후기에 이미 나무로 만든 '면자기'가 개발됐다. 하지만 장정 한두 사람이 면자기 위에 올라타서
온몸으로 힘을 줘야 겨우 메밀국수 한 타래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그 생산량이 사람들의 입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마침내 1932년 6월에 함경남도 함주군의 철공소 주인 김규홍이 쇠로 만든 냉면기계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계를 사용하면 한 사람이 재래식보다 세 배 이상의 속도로 국수를 내릴 수 있었다.
냉면집의 온 부뚜막을 다 차지했던 재래식에 비해 좁은 공간에 설치해도 메밀국수 내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전에는 그을음이 가득한 부엌에서 사람이 천장까지 올라가 면자기를 누르다 보니,
천장에 붙은 그을음과 사람의 땀이 메밀국수가 익는 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에 비해 김규홍이 개발한 제면기는 매우 위생적이었다.
이것이 시간을 거듭하면서 요사이 냉면집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제면기로 진화했다.
그렇다고 냉면이 그 인기를 한없이 누린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냉면집의 성업은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여름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식중독 사건이 발생했다. 돼지고기와 육수의 만남은 한여름에 대장균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심지어 배달되는 냉면 육수에 독을 타서 사람을 죽이는 사건도 일어났다. 여기에다가 냉면이 대중음식으로 변하자
먹을 수 없는 화학물질로 냉면을 만들어 원가를 줄이려는 주인도 생겨났다.
가을 메밀이 냉면의 수요를 맞추지 못하자, 아예 메밀가루를 넣지 않고 다른 전분으로 질긴 국수를 만든 다음에
메밀국수처럼 색만 들이는 냉면도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서울 사람들은 메밀국수가
고무줄처럼 질겨야 진짜 냉면이라고 착각을 한다.
지금도 온 나라에 냉면집 천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꽁꽁 얼은 김칫독을 뚫고 살얼음이 뜬 진장 김칫국에다
한 저(箸) 두 저 풀어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별건곤' 제24호)을 즐기기는 쉽지 않다.
육향 짙은 육수에 100% 메밀면 말아 넣은 진짜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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