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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전쟁이 끝나자 서애는 전쟁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쓴 채 물러났다가 2년 뒤인 1600년에 복관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징비록을 저술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징비록은 그가 죽은 지 40년 뒤인 1647년(인조 25) 외손자 조수익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서야 간행되어 세상에 알려졌으니, 그의 말년은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은 것 같다.
서애의 고향이자 징비록의 산실인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河回)마을은 낙동강이 일월산 지맥인 남산 부용대와 화산(花山; 271m) 사이를 S자로 휘감고 흐른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지만, 마을사람들은 강물이 휘돌아간다고 해서 ‘물도리 마을’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상 산 태극 수 태극 혹은 물 위에 떠있는 연꽃 형이라 하여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하회마을 전통시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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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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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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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한 이후 국내·외에 더욱 널리 알려졌고, 2010년 7월에는 유교적 양반문화와 주민들의 공동체놀이가 잘 보존되고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하회마을은 중앙고속도로 남원주나들목을 빠져나와 영주~서안동나들목으로 나가거나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함창나들목을 거쳐서 문경과 예천방면 34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안동에서는 풍산 방면 916번 지방도로를 약22㎞ 달려야 한다.
만송정과 부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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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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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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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수령의 느티나무인 삼신당 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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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을 집필한 장소로 알려진 옥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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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길 건너편에 서애고택인 기와집 충효당(忠孝堂) 앞마당에는 엘리자벳 여왕이 하회마을 방문기념으로 심은 구상나무 한 그루가 있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충효당과 충효당의 오른쪽에 징비록을 비롯한 류성룡종손가문적(보물 제160호) 등 11종 22점과 류성룡종손가유물(보물 제460호) 등 풍산 류씨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영모각이 있다.
영모란 풍산 류씨 족보인 영모록(永慕錄)에서 따온 것인데, 현판은 1966년 6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충효당은 서애가 살던 초가집을 그의 사후에 제자와 유림들이 지은 것이라고 하고, 1572년 서애가 31살 때 부친상을 당한 뒤 3년 동안 삼신당 신목 남쪽의 원지정사에서 기거했고, 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에는 부용대의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집필했다는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충효당과 영모각 등은 모두 그의 사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에는 서애의 형 겸암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의 나쁜 기운을 막는다고 소나무 1만여 그루를 심고, 정자 만송정(萬松亭: 천연기념물 제473호)을 지었다고 한다. 소나무 숲은 여름에는 홍수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북풍을 막아주었지만, 현재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만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7월 16일 밤 강 건너 부용대 까지 숯가루를 넣은 봉지를 매단 밧줄을 이어서 불을 지르는 뱃놀이와 줄불놀이를 벌이는데,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부활되었다.
강 건너 깍아지른듯한 바위산 부용대 오른편에는 서애가 45살 때 지은 옥연정사가, 약500m 떨어진 부용대 왼쪽에는 서애의 형 겸암의 겸암정사가 있다. 1605년 마을이 수해로 침수되자 서애는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모래톱이 가득한 냇가나 다름없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는 왕복 3000원을 받는다.
하회마을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하회탈이 가장 유명한데, 하회탈은 마을에 살던 허 도령이 꿈에 마을의 수호신으로부터 가면 제작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드는 것을 처녀가 몰래 문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자 허 도령이 부정을 타서 죽은 것이 유래라고 한다.
양반과 선비, 파계승 등 다양한 인간들의 위선적인 모습의 가면을 쓰고 춤과 재담으로 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하회탈은 1954년 미국문화원 대구지역 문화담당관 맥타카드(Arther Joseph Mactaggart)교수에 의해서 처음 학계에 발표된 이후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동·서양에는 탈과 가면 문화가 많지만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어서 보존성이 떨어지고 놀이가 끝나면 대부분 불태워버려서 남은 것이 드믄데, 하회탈은 다양한 인물상을 오리나무로 정교하게 깎아서 두세 번 옻칠을 하는 등 세련미와 탈집에 보관하여 전수되고 있는 것을 평가한 것이다. 하회탈은 양반·선비·각시·중·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 다양한 12개의 탈이 있지만, 현재 9개의 탈만 탈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한편,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화산을 끼고 왼쪽 비포장 길로 약6㎞쯤 들어가면 병산서원(사적 제260호)이 있다. 서원은 서애가 선조 5년(1572년)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머물러 있을 때 풍산에 있던 풍악서당을 옮긴 것으로서 노송과 백사장이 있는 강 건너 산이 병풍처럼 생겼다고 해서 병산서당이라고 했다. 서애의 사후인 광해군 6년(1614) 제자와 유림들이 병산서당을 병산서원으로 확장했지만, 1863년(철종 14)에야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회마을은 획일적인 흙담, 엉성한 초가지붕의 이엉들, 잘 다듬어진 골목길, 정작 주민들은 잘 눈에 띄지 않는 등 마을 전체가 깔끔한 영화세트장 같지만, 고즈넉한 병산서원이 훨씬 정감 있다.
금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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