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런던 올림픽의 반가운 음악들
1.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 Isles of Wonder
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사실, 올림픽 개막식은 재미있기가 상당히 어려운 이벤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나라를 어필해야 하니
의무적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요소들이 있을 거고,
당연히 평소에는 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정치권의 이상한 개입도 있을 것이고,
거기에 숭고한 올림픽 정신과 인류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메세지까지 전해야 하니,
재미있는 게 튀어나올 리가 만무하다.
서울 올림픽의 개막식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만약 지금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면 비보이, 김치, 아리랑, 사물놀이,
태권도가 등장한 후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공을 굴리는 장면이 등장할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괜찮은 “구경거리”일 수는 있어도, “재미있는 쇼”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당장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만 봐도 그렇다.
물론 엄청나게 멋있고 웅장한 장면들과 중국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지기는 했지만, 역시 “구경거리” 카테고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Isles of Wonder]라고 이름 붙여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달랐다.
작품으로 만들어서 무대에 올려놓아도 돈을 지불하고 볼 만큼 “재미있는 쇼”였다.
그 뒤에는 [트레인스포팅],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명장 반열에 오른 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과 음악감독을 맡은
영국 일렉트로닉 아티스트 언더월드(Underworld)가 있었으며,
영국의 근현대사, 문학, 영화, 드라마가 녹아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50년간 그 위대함을 지속적으로 증명했던 영국의 대중음악이 있었다.
영국은 올림픽 개막식을 통해 경제규모로도, 인구수로도, 영토의 크기로도 얻을 수 없는,
오로지 ‘문화적 내공’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증명했다.
3시간 반의 개막식 동안 수많은 곡들이 등장했다.
하나의 글로 모든 곡들을 소개할 수는 없겠지만, 그 중에서 인상깊었던 곡들을 뽑아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대니 보일이 감독한 짧은 영상으로 막을 올렸다.
런던을 상징하는 테임즈강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개막식이 열리는
올림픽 경기장까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영상이다.
영상의 시작을 알리는 곡은 퍽 버튼스(Fuck Buttons)의 ‘Surf Solar’이다.
일단 놀라운 점은 이 곡을 만든 영국 일렉트로닉 듀오의 이름이 퍽 버튼스라는 거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하는데 개막식의 포문을 여는 노래가 밴드 ‘개XX’의 곡인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
Surf Solar’는 이들의 두 번째 앨범 [Tarot Sport](2009)에 수록된 첫 번째 곡으로,
이 앨범에 실린 ‘Olympians’는 선수입장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참고로 [Tarot Sport]는 정말 명반이므로 아직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꼭 들어보길 권한다.
이내 영상은 런던 도심으로 이동한다. 빅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Time’이 잠깐 흘러나오며,
32년간 대중들에게 대중음악과 순수예술을 가리지 않고 소개해온
TV프로그램 [The South Bank Show]의 테마음악도 등장한다.
이후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God Save the Queen’이 나오는데
영국 여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곡이 영국 여왕이 참여하는 이벤트에 등장했다는 것도 재미있다.
이후 런던의 전경을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화면이 나오는데,
이 때 잠깐 나오는 음악은 198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BBC 연속극 [이스트엔더스(EastEnders)]의 주제곡이다.
이 타이밍에 그 노래가 나온 이유는 [이스트엔더스]의 오프닝이
이 화면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런던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깨알 같은 오마주다.
이후 영상은 런던의 상징 중 하나인 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으로 이동한다.
이 장면에서는 클래시(The Clash)의 명곡 ‘London Calling’이 등장하며,
영국이 낳은 위대한 클래식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Pomp and Circumstance Op.39 March, No 1 in D’가 흘러나온다(궁금하진 않겠지만,
이 곡은 개인적으로 엘가의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릴리 알렌(Lily Allen)의 ‘Smile’이 아주 잠깐 등장한 이후, 뮤즈(Muse)의 ‘Map of the Problematique’를
배경음악으로 카메라가 경기장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올림픽 개막식이 시작된다.
Green and Pleasant Land & Pandemonium
농경사회 시절 영국의 모습과 산업혁명을 멋지게 표현해낸 세그먼트다.
이 세그먼트를 이끈 아티스트는 스코틀랜드 출신 솔로 퍼커셔니스트 에블린 글레니(Evelyn Glennie)다.
솔로 퍼커셔니스트로서는 처음으로 프로 뮤지션 커리어를 시작한
이 여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리듬을 몸으로 느끼며 장애를 극복했다. 그녀는 다른 1,000명의 드러머와 함께
이번 개막식을 위해 언더월드가 특별히 작곡한 곡 ‘And I Will Kiss’를 연주했다.
Second to the Right, and Straight on Till Morning
영국의 무상의료보험 시스템인 NHS(National Health System)에 바치는
헌사인 이 세그먼트는 한 사회를 대표하는
복지시스템도 개막식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 세그먼트의 음악을 책임졌던 아티스트는 클래식부터 일렉트로닉까지,
프로그레시브 록부터 댄스음악까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음악활동을 하는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였다.
그는 자신의 히트곡인 ‘Tubular Bells’와 ‘In Dulci Jubilo’를 연주하며 이 세그먼트에 딱 맞는 음악을 선사했다.
Chariots of Fire
로완 앳킨슨(Rowan Atkinson), A.K.A. 미스터 빈이 등장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세그먼트다.
그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사이몬 래틀(Simon Rattle)이 이끄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리스 작곡가 반젤리스(Vangelis)의 곡인
‘Chariots of Fire’를 연주했다. ‘Chariots of Fire’는 1981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 [불의 전차]의 주제곡이다.
[불의 전차]는 1924년 올림픽에 참가했던 두 명의 영국 육상선수
에릭 리델(Eric Liddell)과 헤롤드 에이브람스(Harold Abrahams)에 대한
역사영화로, 올림픽에 출전한 영국 선수들에 영화이기에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연주된 것이다.
누군가 “미스터빈한테 [Chariots of Fire]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연주하게 하자”는 엄청난 아이디어를 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Frankie and June say ... Thanks Tim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흥미로웠던 세그먼트다.
바로 SNS와 인터넷이 지배하는 지금 젊은 세대의 일상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자 주인공 프랭키(Frankie)와 여자 주인공 준(June)의
러브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올림픽 개막식에서 러브스토리라니!),
여자 주인공 준 역할을 맡은 18세의 무명 댄서 자스민 브레인버그(Jasmine Breinburg)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기도 하고, 세그먼트 제목에 등장하는 팀(Tim)이
인터넷을 처음으로 발명한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맨 마지막에 등장해서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NeXT Computer로 “This is for everyone”이라는
트윗을 실제로 날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60년대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음악 때문이었다. “어떤 노래가 나오는지를 찾는 것보다,
어떤 노래가 빠져있는지를 찾는 게 더 쉽겠다”는 BBC 해설의 코멘트처럼 이 세그먼트에서
등장한 음악들은 지난 50년간의 영국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선곡이었다.
1950년대 히트팝송인 밀리 스몰(Millie Small)의 ‘My Boy Lollipop’부터 시작해서,
1960년대의 대표밴드들인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
후(The Who)의 ‘My Generation’,
비틀스(The Beatles)의 ‘She Loves You’, 킹크스(The Kinks)의 ‘All Day and All of the Night’가 울려퍼졌고,
70년대의 명곡들인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Starman’,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Wonderful Tonight’,
퀸(Queen)의 ‘Bohemian Rhapsody’,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Trampled Under Foot’,
스페셜스(The Specials)의 ‘A Message to You, Rudy’,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Pretty Vacant’, 잼(The Jam)의 ‘Going Underground’가 등장했다.
80년대는 또한 어떤가? 뉴 오더(New Order)의 ‘Blue Monday’,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의 ‘Relax’,
해피 먼데이스(Happy Mondays)의 ‘Step on’, 유리스믹스(Eurythmics)의 ‘Sweet Dreams’,
소울 투 소울(Soul II Soul)의 ‘Back to Life’같은 80년대 댄스음악들은 올림픽 경기장을
80년대 디스코텍으로 바꾸었고, 프로디지(The Prodigy)의 ‘Firestarter’, 언더월드의 ‘Born Slippy. NUXX’,
블러(Blur)의 ‘Song 2’의 90년대를 지나, 주톤스(The Zutons)의 곡을 커버한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의 ‘Valerie’와
뮤즈(Muse)의 ‘Uprising’이 2000년대를 대표했다.
이 와중에 동런던에서 시작된 그라임(grime) 장르를 대표하는 아티스트 디지 라스칼(Dizzie Rascal)이 등장해
라이브로 자신의 히트곡 ‘Bonkers’를 멋지게 부르며(“bonker”는 미치다는 뜻의 은어다)
수십 년을 뛰어넘은 영국 대중음악의 몽타주를 마무리했다.
The Parade of Nations
선수들이 입장하는 와중에도 멋진 선곡은 여전히 빛을 발했다.
선수들의 입장 분위기를 돋울 만한 업비트 댄스 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중국이 등장하는데 배경음악으로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의 ‘West End Girls’가
흘러나오는 약간 이상한 상황도 있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의 ‘Galvanize’나 언더월드의 ‘Rez’,
앞서 언급했던 퍽 버튼스의 ‘Olympians’ 등의 곡은 선수들 입장과 잘 어울렸다.
아일랜드 아티스트인 유투(U2)의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과 ‘Beautiful Day’가 나온 게 특이했다.
영국팀이 등장할 때는 꽃가루가 날리며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가 흘러나왔는데,
자국 선수들을 소개하기에 이만큼 적절한 시각적 청각적 효과는 없을 것이다.
Arctic Monkeys Live >
2000년대 중반부터 영국을 대표하는 록 밴드로 자리잡은 악틱 멍키스(Arctic Monkeys)가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 함께 개막식에서 가장 긴 시간의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이들은 자신들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I Bet You Look Good on the Dancefloor’와
비틀스의 ‘Come Together’를 멋지게 라이브로 선사했다.
불과 7년 전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던 이들이 7년 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라이브 공연을 펼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The Lightning of the Cauldron
아마 개막식을 통틀어서 시각적인 효과와 음악이 가장 잘 어울렸던 순간이 바로 이때 아니었나 싶다.
성화에 불이 붙고 세상이 떠나갈 듯한 불꽃놀이가 벌어지면서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Dark Side of the Moon]의 마지막 곡 ‘Eclipse’가 흘러나오는 순간 말이다.
Paul McCartney Live >
영국이 올림픽을 치르는데, 개막식에 어찌 비틀스 멤버가 빠질 수가 있겠는가?
역시나 올림픽 개막식의 피날레는 폴 맥카트니가 장식했다.
[Abbey Road]에 실렸던 ‘The End’를 잠깐 연주한 후, 역사상 최강의 떼창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는 ‘Hey Jude’를 불렀다.
수만 명의 관객들과 선수들이 폴 맥카트니 선생님의 지도에 맞춰 떼창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데는 떼창만큼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파워풀한 라이브를 멋지게 소화하는 폴 맥카트니 경의 노익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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