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라면의 역사는 1963년 시작됐다.
반세기 동안 연간 판매량에서 1등을 차지한 라면은 단 3개뿐이다.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은 후발 주자를 뿌리치고 1963년부터 14년간 1등 라면의 자존심을 지켰다.
농심의 안성탕면은 1987년부터 4년간 가장 많이 팔린 라면이었지만 1991년 신라면에 1위를 내줬다.
그 후 신라면은 무려 22년간 1등 라면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1등 라면은 산업화, 현대화 과정에서 변해온 국민 입맛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라면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과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삼양라면은 이전에 없던 먹거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1960년대 초 남대문시장에서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고 라면 사업을 결심했다.
주린 배를 채우는 데 인스턴트 라면만큼 좋은 음식이 없었다.
고열량인 데다 5분만 끓이면 되는 간편한 조리법은 먹고살기 바쁜 산업역군들의 한 끼로 그만이었다.
열량에 비해 맛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는 아니었다.
처음의 삼양라면은 닭고기 국물이 기본이었다. 면도 닭 기름에 튀겼다.
일본 묘조(명성식품)의 기계와 기술을 그대로 들여온 탓에 선택권이 없었다.
열량을 높이기 위해 지방 함유량을 늘려 라면 국물에도 기름기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라면은 1970년대 후반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변신하게 된다.
당시 식품업계와 언론들은 국내 라면시장이 이미 포화상태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1965년 롯데라면으로 출발해 만년 2위에 머물렀던 농심은 ‘질적 차별화’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넘어선 것에 주목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양보다는 맛을 따지는 소비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농심은 1982년 경기 안성에 수프 전문공장을 짓고 ‘라면은 국물맛’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조한 안성탕면을 출시했다.
라면 수프를 만드는 공법은 안성탕면을 시작으로 크게 바뀌었다.
기존에는 열풍 건조, 가열 농축해 만든 원료들을 조합해 수프를 만들었다.
하지만 안성탕면은 브로스(broth) 제조 공법을 도입했다.
브로스는 야채, 고기, 생선 등을 물과 함께 끓여 만든 육수로 모든 요리의 기초가 된다.
라면에서 쓰는 브로스는 생물 원료와 진액 등을 적절히 섞어 익히고 농축한 원료를 말한다.
브로스를 사용하면 국물맛이 진하고 구수해진다.
안성탕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된장과 소고기를 기본으로 시골 장터의 우거지장국 맛을 구현했다.
출시 4년 만인 1987년 매출 442억원, 시장 점유율 12.9%로 삼양라면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국내에 라면이 상륙한 뒤 처음으로 1등 브랜드가 바뀐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고향의 맛’을 공략한 것이 안성탕면의 인기 비결이었다면,
1986년에 나온 신라면은 한국 고유의 매운맛을 파고들었다.
농심은 누구나 좋아하는 얼큰한 감칠맛과 식감을 찾기 위해 전국에서 재배되는
모든 품종의 고추로 매운 맛을 실험하고 200여 종류의 면발을 개발했다.
신라면은 매운 맛으로 1980년대 말 매출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1991년 안성탕면을 화끈하게 제쳤다. 이후 부동의 1위를 굳혔다.
지난해까지 신라면의 누적 판매량은 총 220억개, 금액으로 따지면 8조원이다.
국내 시장에서는 단일 라면으로 25%를 차지하고 있다.
대형마트 등에서 팔리는 라면 4개 중 1개는 신라면이라는 얘기다.
최근에는 스위스 융프라우부터 히말라야, 남미대륙 최남단인 칠레의 푼타아레나스까지
진출해 식품 한류를 이끌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다양한 맛을 찾는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하얀 국물 라면,
비빔라면(계절면), 소스라면(짜장, 카레 등) 등이 고른 인기를 얻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튀기지 않은 건면과 화학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웰빙라면’도 성장세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서서히 변하는 가운데
최장수 1위인 신(辛)라면의 아성을 넘어설 신(新)라면이 나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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