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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 주식 즉 밥의 변화

요리 이야기/식재료2

by 그린체 2012. 10. 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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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의 변화

 

한국생활사 , 시대에 다른 식생왈의 변화 경제와 풍속을 좌우한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영양분을 섭취하는 주된 음식물인 주식(主食)은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주식은 그 지역 사람들의 주된 생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생활습관과 문화를 좌우한다.

우리 조상들의 주식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고, 이에 따라 경제, 풍속, 문화 등도 따라서 변화했다.

 

도토리와 소나무껍질


하지만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많이 먹던 도토리는 기온의 변화와 함께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우리나라의 숲은 약 4000년 전부터 차츰 침엽수(針葉樹)인 소나무가 우세해지더니,

서기 1천년 이후부터는 소나무가 우리나라 숲의 왕자가 된다.

따라서 참나무 등이 줄어 도토리도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434년 2월 기록에는 경상도 진제경차관(흉년을 당한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하는 관리)이 올린 “구황식품으로서 상수리가 가장 좋고, 다음이 송피(松皮)이옵니다.

굶주린 백성이 소나무껍질을 벗겨 식량으로 삼을 수 있도록 허가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이 등장한다.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소나무 껍질은 주된 구황(救荒)식품이었고,

도토리는 주식의 위치에서 밀려나 보조적인 구황식품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19세기에는 땔감을 위해 나무를 많이 베어낸 탓에 산에도 나무가 없어 흉년이 들면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마저 구하기가 어려운 지역도 있었다.

식생(植生)의 변화에 따라 음식 소비도 따라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주식과 변화

 

천년 넘게 한국인의 주식(主食)이 된 벼. 전 세계 인구의 약 40% 정도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 유적에서 벼농사와 관련된 흔적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는 농사가 시작된 시기였다. 하지만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해서 생계의 대부분을 재배 식물에 의존하는

생산경제체계로 변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특히 해양 자원이 풍부한 해안가와 내륙의 평야지역은 농업의 전파 속도가 달랐다.

전기 신석기 시대 유적인 거제 대포 패총(貝塚)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경우, 조개류, 어류, 해양 포유류 등을 주식으로 삼았고,

곡물은 거의 먹지 않았다. 중기 신석기 유적인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에 살던 사람들도 어류를 주로 섭취했다.

1호 주거지 내에서 조와 기장 등이 다량 발견되기도 했으나, 곡물의 실제 소비량은 많지 않았다.

 

곡물의 소비량이 많아진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였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조, 기장, 잡곡 등을 주식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청동기 초기에는 벼, 보리와 같은 작물의 소비량이 매우 적었으나, 후기로 내려갈수록 벼, 보리, 밀, 콩, 팥 등의 소비가 증가되었다.

특히 부여 송국리 유적(기원전 8~7세기)에서는 불에 탄 쌀(炭化米)등이 발견되었다.

송국리 유적과 유물 출토 상황이 비슷한 청동기 시대 유적지들에서는 벼농사와 관련된 논 유적, 수로(水路)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 후기 한반도 남부 지역 사람들의 먹거리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면 특이하게도 벼농사 관련 유적이 크게 줄어들고,

다시 조, 기장, 피와 같은 잡곡이 주된 곡물이 된다.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무렵에 기온이 크게 떨어져 열대작물인 벼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벼농사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벼의 재배기술이 부족해 기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고기 소비


3세기 무렵 고구려는 힘껏 농사지어도 풍족히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좋은 밭이 없었다. 따라서 식량이 부족한 만큼,

약탈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동옥저를 굴복시켜 그들에게 생선과 소금, 해산물 등을 부담시켰다.

약탈을 통한 식량 확보 외에도, 곡물을 대신하여 육류를 확보해 부족한 식량을 메우기도 했다.

 

고구려는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 때 천도를 주장한 측에서 내세운 국내성 지역의 장점으로는 오곡이 잘 자라고,

사슴(麋鹿)과 물고기와 자라(鼈)의 생산이 많다는 점이 들어있다. 사슴 생산이 많다는 것은, 사냥을 통해 사슴 등을 잡아

식량 부족을 메울 수 있다는 장점을 말한 것이다. 사냥은 전쟁에 대비한 군사훈련이란 점 때문에 왕이 적극 실시하기도 했지만,

사냥 그 자체가 멧돼지, 사슴 등을 잡아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 사람들은 말 타고 활쏘기에 익숙했다.

 

고구려는 좋은 밭이 적은 대신,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었다.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았고, 숲을 벌채하는 경우도 적었기 때문에

숲에는 멧돼지, 사슴 등이 많았다. 따라서 숲이 사라져 사냥감마저 적었던 18~19세기 조선시대와는 주어진 환경이 달랐다.

서기 22년 고구려군은 부여(夫餘)를 공격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사냥을 통해 야생 동물을 잡아

굶주림을 면한 바가 있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1~412)은 395년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소와 말, 양을 엄청나게 많이 데려온 적이 있었다. 가축의 숫자 역시 고구려 시대가 고려, 조선에 비해 많았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는 함부로 살생하는 것을 금지하여 육류 소비가 크게 위축되었었다.

조선 역시 가축의 숫자가 적어 육류 소비가 많은 나라가 아니었다. 이에 비한다면 목축의 비중이 높은 부여와

수렵의 비중이 큰 고구려 등 삼국시대 사람들의 식량 소비에서 육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비해 높았다고 하겠다.

 

 

 

쌀의 비중이 다시 커지다

 

 

충청북도 제천시에 위치한 의림지(義林池).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제천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고대 수시시설로 손꼽힌다. 이러한 수리시설은 벼농사를 촉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삼국시대 사람들의 주식이 육류는 아니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기록한 [동명왕편(東明王篇)]에 따르면, 주몽(朱蒙)이 고구려를 세우기 위해

부여에서 떠날 때에 어머니 유화부인이 그에게 보리(麥)를 비롯한 오곡(五穀)의 씨앗을 주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농업을 주산업으로 삼은 나라였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 역시 나라를 세울 때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을 골랐다.

삼국시대 사람들의 주식은 오곡, 특히 보리와 조였다고 할 수 있다.

 

진수(陳壽, 233~297. 서진(西晉)의 역사가)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에는 부여와 고구려, 동옥저(東沃沮), 한(韓) 등에서

오곡이 자란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오곡이 어떤 곡물인지는 논란이 많은데, 대체로 기장, 조, 보리, 콩, 마(麻), 피, 쌀 등을

오곡에 포함시키곤 한다. 그런데 부여는 고위도(高緯度) 지역이기 때문에 쌀을 재배했을 가능성이 극히 낮다.

게다가 [삼국지(三國志)] 〈한(韓)〉조에는 변진(弁辰)의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稻)를 심기에 적합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쌀은 3세기경에는 오곡에 포함되지 않았던 특별한 작물에 불과했다.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지약아식미기(支藥兒食米記) 목간 2면의 모습. 아래 부분에 쌀 미(米) 글자가 보인다.

 

시루와 솥. 솥과 시루의 등장으로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이 바뀌었다.

시루는 떡을, 솥은 밥을 만들어 먹게 해주었다.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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