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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덕일과 함께 떠나는 근대유산투어

여행,사진방/여행스케치

by 그린체 2013. 1. 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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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및 독립 현장 투어(3시간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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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들어오면서, 사실상 조선 황제는 거의 무력화되고

'통감관저'에서 모든 정책이 결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을사조약에 의해서 외교권만 빼앗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한 국가가 외교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독립국가로서의 면모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므로

사실상 이곳이 황실을 대신해서 조선을 통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나라 망하는 도장을 찍게 되는데 1대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

2대 통감 소네 아라시케,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이다.

이 세 명의 차이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문관 온건파,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군부 강경파였는데

군부 강경파는 대한제국을 바로 군사적으로 점령하자는 주의고, 이토 히로부미는 좀 더 시간 여유를 두고

국제 여론을 보고나서 점령하자는 주의였다.
한 마디로 합방된 이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지어서 이전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통감관저가

점령군 총사령부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를 모르고 현대를 얘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 현대사의 많은 문제점도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역사로부터 계승할 것이 있고 단절할 것이 있는데 총독관저가 있던 자리를 그대로

청와대로 사용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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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통감으로 있을 때 중요한 정책들을 여러 개 결정했는데 그 중 하나가 교육문제다.

그 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독립 운동가들은 교육가였다. 당시 독립운동가하면 다 자기 마을 사랑방에서

학교를 열어 가르치던 사람들이다. 원래 동양사회에서의 교육이라는 것은 국가의 인가라는 게 필요 없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사립학교를 설립한 공자처럼, 가르칠 실력이 있고 배울 학생이 있으면 가르치는 식이었다.

그래서 각 마을마다 관학이 있다면, 사학은 그 10,000배쯤 있었다. 즉 우리나라는 관학보다

사학 중심의 전통이 오래된 나라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부임한 후 이 사학들을 불온의 온상으로 낙인찍고,

조선 사립 학교령을 만들어 공표한다. 관립학교는 이미 장악을 했으므로 사립 학교령을 만들어서

사립학교를 통제하기 시작하는데 그 하나가 사립학교 설립자 및

교원들의 품성 문제를 걸고 넘어진 건데 품행이 불량한자가 있으면 학교 인가를 취소했다.

이토의 눈에는 반일사상, 독립사상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품행이 불량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기존에 설립되어 인가받았던 학교들도 재심사하기 시작하는데, 시설 기준을 대폭 강화시켰다.

예전엔 자기 사랑방에서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을 막대한 자본이 없으면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교육 사업에 뜻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교육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두 이토 히로부미 때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립 학교령 이후에는 품행이 온건한 자,

친일적인 사상을 가진 자, 선교사, 막대한 돈이 있는 사람들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하나가 유명한 호색가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통한 매춘문화의 유입이다.

친일문제연구가였던 임종국은 이토 히로부미가 들어오면서 매춘문화도 같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흔히 조선에 매춘문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에는 기생문화가 있었다.

기생은 보통 1패 2패 3패로 나뉘어 1패는 고습 예술가 예인들, 연주만 하고 절대 몸은 팔지 않는 여성들을 의미했고,

2패는 가끔은 몸도 팔기도 하는 그런 부류를 2패라고 했다. 마지막 3패는 세칭 막 몸을 막 굴리는 경우였지만

매춘과는 달랐다. 이토 히로부미가 들어오면서 자기가 일본에서 사귀었던 여자들을 데려오고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매춘을 목적으로 하는 유곽을 열었던 것이 우리나라 매춘 문화의 시작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점령하자는 쪽에 동의를 한 뒤 3개월 뒤에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서 죽고,

데라우치가 부임하자 당시 노론 당수였던 이완용은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이 나라를 팔아먹는 공을 세우기도 전에

일본 쪽에서 먼저 점령해버리면 어떡하나라는 걱정, 그리고 이용구와 송병준이 주도하던 일진회가 한일합방

청원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매국활동에 나서니까 자칫 나라를 넘기는 공을 일진회에게 빼앗길까 하는 우려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하자마자 당시 자신의 비서였던 이인직(혈의 누 작가)을 비밀리에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스에 보내서 비밀리에 매국 협상을 벌인다.

매국에 대한 댓가로 조선 귀족이라는 타이틀과 막대한 특별 예산을 담보 받은 이완용은

바로 데라우치와 합방 조약을 체결한다. 결국 1910년 8월 말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같은 해 10월 7일 일본에서는 75명에 달하는 한인들에게 귀족령을 만들어서

귀족으로 봉해주고 막대한 예산을 편성해서 상금을 대폭 주게 되는데 그것은 모두 다 이완용의 비서인

이인직과 고마스 사이에 비밀 협상을 통해서 이미 합의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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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354호

탑골 공원은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영국인 브라운 만든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탑골이라고 불린 것은 최근의 일이고 이전에는 탑이 있는 공원이라고 해서

영어식 발음으로 파고다라고 했다. 탐이 있는 주변을 탑동, 탑골로 불렀기 때문에 탑골공원,

탑동공원, 탑공원으로 불린다.

3.1 운동의 발상지이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탐(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팔각정(서울 시도유형문화재 제 73호)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있고,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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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회관은 천도교 중앙대교당, 흔히 수운 최제우 선생의 호를 붙인 이름이다.

사실 천도교는 동학에서부터 얘기를 하지만, 동학은 단순한 민족 종교가 아니라 그동안

유교사상으로 인해 억눌려온 우리 민족 전통의 풍류도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

동학은 단순히 조선말에 나타난 종교 현상이라기보다는 당시 폭발적으로 분출됐던 문제점들,

즉 옛날에 해체되었어야 할 신분제인 반상의 문제, 밀려들어오는 외세의 힘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의 문제,

사상적으로도 외래사상들에 맞서 민족 내부의 주체사상을 지키는 문제 등

그 모든 것을 극복해보자는 의지가 동학으로 결집된 것이다.

거세게 타오르던 동학은 나중에 두 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하나는 이홍구 등이 추진하는 친일파이고,

또 하나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주도한 천도교이다.

이중 중심이 된 것이 후자이고 사실상 3.1운동도 천도교가 중심이 돼서 개신교와 불교를 끌어들여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 기독교 쪽에 운동자금을 대준 것도 모두 천도교다. 천도교가 독립운동의 자금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천도교에서 성미를 모으는데, 전국의 성도가 백만 이상 됐으니까 거의 모든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운동 때 구속이 되었다가 죽기 2~3일 전에 석방이 된다. 일본 측에서는 옥중에서 죽으면

자기들이 죽인 게 되기 때문에 풀어준 것이므로, 손병희 선생은 결국 옥사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 후에 천도교는 한 번 더 분열을 하게 되는데, 3.1운동 때 많은 역할을 했다가 이후 친일로 돌아서는

최린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 신파와, 이후에도 격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박인호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 구파이다.

특히 우리는 해방 이후 일제 식민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지만 박인호 선생이 주도한 운동 중에

'멸왜기도'(滅倭祈禱) 운동이 있었다. 성호 긋고 식사할 때마다 일본을 멸망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발각되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이 사건으로 천도교 구파는 몰락을 하고

오늘날까지도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항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종교나 세력들은 해방 이후에도 거의 명맥을 유지하고 못하고 있다.

천도교도 이 건물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천도교 자체는 사실상 거의 몰락을 했다.

이런 부분들도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 중에 하나이다.

이곳에서 주도한 3.1운동은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은 우리나라 점령 후 극도의 공포정치를 행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3.1운동 이전까지 초등학교 선생이나 여선생까지 칼을 차고 수업에 들어오게 했고,

헌병경찰제를 실시해 군이 경찰역할을 대신하도록 했다. 특히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삼은 후에도

일본 헌법을 조선에는 배제시켜, 일본 헌법에서 정한 보호도 받을 수 없게 했다. 심지어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적용,

매를 때리는 것을 형법에 규정해 놓았다. 이런 공포정치 10년 만에 3.1운동이 일어나서 대대적으로

항일 시위가 벌어지니까 일본 내에서 과연 조선을 개혁 통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일어난 것이다.

특히 공포정치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면서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으로 온 이후로는 '문화 통치'란 이름으로

그 이후부터는 신문발간도 형식적으로 허용하고 잡지 출간도 허용하는 등

문화통치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3.1운동이다.

과거 개벽사가 이 자리에 있었는데 개벽사((開闢社) 역시 천도교 계통의 강한 항일 성향을 갖고 있었다.

이 개벽사는 6.10만세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6.10만세 사건은 3.1 운동 이후로 크게 일어난 만세 시위 사건인데, 창덕궁에서부터 온통 서울 일대가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그 주도를 한 세력이 조선공산당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2대 회장 권오설이다.

권오설이 상해로 망명한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손잡고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인산(장례식)일을

이용해서 일으킨 것이 6.10 만세운동이다.

권오설 등은 6.10 만세운동을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전단 10만 매를 인쇄하며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고 말았다. 일본 오사카에서 발생한 중국 지폐위조 사건에 연루된

한국인 3명이 개벽사로 도망을 오면서 발각됐는데, 한국인 위폐범을 잡기 위해 수색하는 와중에 당시

개벽사에 숨겨두었던 6.10만세 때 뿌릴 유인물 중 한 장이 발견된 것이다.

1925년에는 이곳에서 조선기자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이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표면적으로 조선기자대회를 열어 일본 경찰들의 시선을 조선기자들에게 돌린 다음

1925년 4월, 조선기자대회의 마지막 날 조선공선당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곳에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현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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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57호

근처에 서운관이 있어서 운현궁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자기 아버지 흥선군과 함께 살았던 잠저이다. 잠저란 용이 왕이 되기 전에 물속에 잠겨있다는

주역의 이야기로부터 비롯된 말로,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을 뜻한다.

노한당이란 곳은 대원군이 고종 즉위하고 나서 10년 동안 섭정을 하던 장소로 일종의 사랑채다.

위로당은 안채인데 위로당이라고 한 것은 부인 민씨와 대원군이 살았기에

두 노인이란 의미에서 이름 지어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여기서 대원군이 10여년 동안 정치를 하다가 최익현이 상소를 올리면서 10년 만에 고종 친정이 시작되는데,

처음 10년 동안은 대원군이 정사를 대신했고 그 이후에 부인 민씨가 대신하게 된다.

운현궁은 원래 지금보다 훨씬 컸고 고종이 왕이 된 다음에 훨씬 크게 증축을 해가지고 4대문까지 있었다.

임금이 행차하면 절차가 복잡하니까 고종을 위한 문이 따로 있었을 정도다.

흥선대원군이 지나가는 문도 따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원형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만 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잠저고 대원군이 고종 즉위 후에 10년 동안 국정을 총괄했던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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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높이고 있지만 역사적 실체는 그와 다르다. 당시 사람들의 평가나,

실제 정치행위와는 다르게 일본군에게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추모를 하고 있는데 잘못된 거다.

대원군이 10년동안 섭정하고 난 다음, 사실상 조정은 민씨 일파들이 모든 걸 장악했다.

당시 사람들이 고종을 비판한 것도 아버지를 내쫓고 자기가 직접 정치를 하면 모를까,

부인일파를 대거 끌어들여 정치를 하면서 심지어 대원군과는 정 반대방향으로 갔다는 점이다.

사실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도, 아무런 국교도 없이 느닷없이 일본이 흑선을 끌고 와서 강제로 개항한 것처럼 말하는데

일본하고는 원래 국교는 물론, 통신사 왕래도 있었고 동네 외관에 가면 일본인 거주하는 지역이 있을 정도로

통상도 이뤄지고 있었다.
처음 일본에서 교역을 하자고 했을 때 이쪽에서 조선 대표로 나갔던 사람들은 국제조약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강화도 조약이 불평등하다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관세권 포기다. 물건이 들어오면 당연히 관세를 붙여야 하는데

그에 대한 개념도 없이 다 포기해 버린 것이다. 당시 명성황후가 주도하던 조정은 대원군이 쇄국했으니까

우린 무조건 문을 열자 하는 생각에서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으로 사실 개항을 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다만 당시 조선은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는 게 문제다.

최소한 관세 자주권이라든지 의지가 있었다면 충분히 평등 조약을 맺을 수 있었는데

불평등 조약의 문을 열면서 서구 열강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정치하던 대원군을 내쫓고 나서 아무런 역할을 주지 않았던 것도 문제다.

고종과 대원군은 이후 철천지원수가 되어, 나중에 대원군이 세상 떠났을 때 장례식에 참석을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자지간이 극도의 원수사이가 돼서 싸우게 된다.

그 당시 사람들도 비판했듯 고종은 처신을 잘못했다. 10년간 섭정을 했으면 형식적으로라도

태상의 지위로 올려서 국정을 상의한다든지 최소한의 정치에 관해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은 줬어야 하는데

일체 배제하고 민씨 일파하고만 정치를 하려드니 대원군이 나중에 고종을 타도하려고 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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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식 회장 : 거의 세계 85% 이상 되는 민족들이 타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식민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독립운동을 전개한 나라는 없었다.

1943년도 카이로 회담 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이 만나서

전쟁이 끝난 뒤 전후질서에 대해 얘기했다.

이 중 장개석과 처칠 간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두고 논쟁이 붙었다.

회담 참석 전에 김구를 비롯해서 임시정부 사람들로부터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들은 바 있는

장개석은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당시 식민지를 가장 많은 갖고 있던 영국은 식민지로 있던

한국을 해방시킨다고 하니까 강경하게 반대했다. 장개석이 처칠한테 세계 민족 중 80% 이상이

식민지 상태에 있지만 한국처럼 독립운동을 위해 전 민족이 나선 나라가 없다고 얘기하자 할 말이 없던

처칠은 한국은 일본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정부를 할 수 있는 자치능력이 없는 나라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다시 장개석은 한국은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하고 있다고 재반박했고, 결국 루스벨트가 중재에 나섰다.

그래서 한국을 독립시키는 건 맞는데 적절한 시기에 하자고 조율한 결과가 카이로 선언이다.


출처 : 근대를 말하다
저자 : 이덕일 지음
출판사 : 역사의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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