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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와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기타방/우표여행

by 그린체 2010. 10. 2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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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청년실업가, 장 앙리 뒤낭 “국제적십자” 운동 전개

 

스위스 청년실업가, 장 앙리 뒤낭 “국제적십자” 운동 전개 내용시작

 

 

 청년 실업가였던 스위스의 뒤낭(Jean-Henri Dunant, 1828.5.8~1910.10.30)은

1859년 6월 사업상의 일로 나폴레옹 3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 지방을 여행하던 중,

솔페리노 전투를 목격하고서 그 곳에서 많은 전상자들이 그대로 버려져있는 비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고,

인근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아군과 적군의 차별 없이 전상자들을 돌보아주기 시작했다.

그 후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과 그의 체험을 기초로,

상병자를 구호하기 위한 헌신적이고 자격있는 자원봉사구호단체를 각 국에 설치할 것과 이들의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적인 조약체결을 제안하는 내용의 “솔페리노의 회상, Un Souvenir de Solferino”이라는

 책으로 엮어 1862년 11월에 출판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지지를 받았다.

 이 후, 제네바 공익협회(公益協會)’에서 위촉한 이른바 ‘5인위원회(五人委員會)’가 전시상병자구호를 위한

국제적 상설기관의 설치를 유럽 여러 나라의 유력자에게 제창한데 이어,

1863년 10월 26~29일에 제네바에서 열린 창립회의에서 전시상병자구호를 위하여 군위생부대의 보조기관으로서

스위스에 국제적십자위원회와 각국에 적십자사를 설립하여,

적십자사와 그 소속 간호요원에게는 중립적 지위(中立的地位)를 인정하고, 국제적 보호를 부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간호요원이 패용하는 만국공통의 표장(標章)으로서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채택되었다.

 
 

프랑스 사회당 출신 최초의 대통령,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 출신 최초의 대통령, 미테랑 내용시작

 

프랑스 사회당 출신 최초의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1916.10.26~1996.1.8)은 2차례(1981~95)에 걸쳐

프랑스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프랑스와 서유럽의 정치, 경제적 통합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파리대학 졸업 후 언론인 겸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독일군 포로가 되었으나,

수용소에서 탈주하여 대독일 저항운동에 참가하며 정치권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대통령 집권 1기 시절 미테랑은 금융과 주요 산업체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했으며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사회보장의 혜택을 확대했다.

외교에 있어서는 소련에 상대적으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는 반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썼다.

미테랑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의 심화와 기타 문제들을 야기했던 까닭에 1983년부터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기 시작했고,

첫 임기가 끝날 무렵 프랑스 사회당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돌아가는 계기를 초래하였다.

집권 2기시절 미테랑은 유럽 통합을 촉진하고 프랑스 경제에 대한 독일의 비교우위에서 벗어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 문제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특히 1993년까지 12%로 상승했던 실업률은 낮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로 사회당은 1993년 총선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곤란을 겪었고, 미테랑은 집권 막바지 2년을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하의  중도우파와 이른바 '동거정부'를구성해야 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미테랑은 프랑스 대통령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로 기록된다.

 
 

대륙의 정적을 깨운 하얼빈의 총성

 

대륙의 정적을 깨운 하얼빈의 총성

 

 내용시작1909년 10월 26일, 31살의 나이였던 안중근의사는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총살응징했다.

안중근은 오전 7시경 역으로 나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역사안 찻집에서 이등의 도착을 기다렸고,

오전 9시경 이등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자 러시아 코코프췌프 대장대신이 기내영접을 하였다.

약 20분뒤 이등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 안중근의사는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서 있다가 약 10여보의 거리를 두고 선 자세로 브로닝 권총을 발사하여

이등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이등을 수행하던 하얼빈 천상 총영사, 삼 비서관, 전중 만철 이사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코리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3번을 외친 직후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안중근은 하얼빈역 헌병대 분파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오후 8,9시경에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치명상을 입은 이등은 곧 러시아 장교들과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20분 후에 69세로 절명했다.

대한제국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제거한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제6회 공판개정(최종판결)에서 일본 형법을 적용시켜 사형선도를 언도받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공판개정 중에,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한바 있으며 최종판결을 선도 받은 후에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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