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으나 단맛의 고수 인천 짜장면
자장면은 한자 炸醬麵[작장면]이 우리말화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炸醬麵이라 쓰고, "차오장멘" 비슷한 발음을 한다.
한때 자장면만 표준어였는데 2011년 짜장면도 표준어로 인정을 받았다.
음식 이름을 풀면, 장[醬]을 볶아[炸] 올린 국수[麵]라는 뜻이다. 이때의 장이란 중국 된장을 말한다.
콩과 밀을 찌고 소금을 더하여 발효한 음식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첨면장(甛麵醬) 또는 첨장(甛醬)이라 한다.
장류는 한중일이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데, 콩과 밀로 발효하는 장류도 한국 전통에 있다.
첨면장과 그 맛이 비슷한 것으로 보자면, 보리된장과 밀된장이 있다.
중국, 특히 산동성에서는 이 첨면장을 돼지고기와 함께 볶아 국수에 올려 먹는 음식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 음식이 한반도에 건너와 자장면으로 변하였는데, 그 여러 변형 중 핵심은 첨면장에 있다.
장의 색은 검어지고 짠맛은 줄었으며 달척지근하고 구수한 맛이 강화되었다.
이름도 춘장(春醬)이라 바뀌었다.
자장면 맛은 전국의 모든 중국집이 거의 같다. 대부분 한 브랜드의 공장 춘장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장면 먹기가 더 편할 수 있다. 기대 이하는 드물기 때문이다.
화교가 가지고 온 국수
음식은 사람을 따라 옮겨다닌다. 자장면은 중국인이 한반도에 이주하면서 가지고 온 음식이다.
중국인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이다.
당시 청나라 군대와 함께 화교 상인 40여 명이 들어왔다.
1884년 인천에 청국조계가 설정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교들이 이주하여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화교 중 다수가 식당업에 진출을 하였는데, 자료에 의하면 1922년 한반도에 2,000여 가구의
화교가 살았고 이 중 30% 이상이 음식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화교 음식점은 규모가 컸다.
당시 경제 사정에서는 외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상류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기생이 있었고 마작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으며 숙박업도 겸하였다.
이 화교 음식점을 청요릿집이라 불렀다. 지금의 인천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공화춘, 송죽루, 중화루, 평화각, 빈해루 등등의 청요릿집이 영업을 하였다.
이들 청요릿집에서 처음부터 자장면을 팔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화교 중에는 인천 부두에서 노동을 파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허름한 국수 노점이 있었을 수도 있다.
수타면대에 웍(중국식 조리 팬)을 올릴 수 있는 화덕만 있으면 국수 좌판을 차릴 수 있다.
한반도 최초의 자장면은 인천 부두의 가난한 화교 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좌판의 것일 수도 있다.
한국 자장면은 다르다
일제강점기에 자장면은 그렇게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었다.
고급의 청요리 외 대중의 인기를 끈 중국음식은 호떡이었다.
그때의 호떡은 지금처럼 군것질의 호떡이 아니었다.
화덕에 두툼하게 구운 빵으로, 차와 함께 끼니로 먹었다.
호떡 가게가 얼마나 많았는지 화교들에 의한 국부의 해외 유출을 걱정하는 말이 돌았다.
1924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경성부 내 설렁탕집이 대략 100군데인데,
호떡집은 대략 150군데나 된다"며 조선을 걱정하는 토막 기사를 올리고 있다.
1930년대에 들면서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으로 일시적으로 줄기는 하였으나 많은 화교가
한반도에 꾸준히 살아 1940년대에는 8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화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남북분단과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국교 단절로 이어지는 정치 상황에 놓인 화교는 이 땅을 떠나야 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를 떠나는 화교는 더 늘어나 1952년 화교 인구는 1만 7,700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화교 인구는 정체되었다. 한국 정부가 화교의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70년대에 인천의 청요릿집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차이나타운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였다.
한국 자장면의 번창은 한국 화교의 '몰락'과 그 시점을 같이한다.
한국전쟁 후 얼마 남지 않은 화교는 재산권 행사에 대한 제약으로 큰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작은 식당을 열고 한국의 서민을 상대로 음식을 팔았다.
요리가 아닌 끼니의 음식을 내기 시작한 것인데, 가격이 싼 국수가 주요 메뉴로 등장을 하였다.
공장 춘장이 나오자 원가는 떨어지고 일은 더 쉬워졌다.
1960년대에 들어 한국 자장면 맛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재료가 등장하였다. 양파이다.
양파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906년이지만 대량 재배는 1960년대에 이루어졌다.
양파는 식량작물이 아니어서 농사에서 뒤로 밀려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 정부의 분식 장려가 있었다.
말이 분식 장려이지 식당에서 밥을 팔지 못하게 강제하였다. 끼니로서의 중국집 자장면이 급부상하였다.
그 수요를 보고 한국인도 자장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중국집은 한반도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12년 현재 한국 내 중국집은 3만 5,000여 곳에 이르며, 이 모든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낸다.
한편, 2012년 현재 한국 내 화교 인구는 2만 5,000명 정도이며,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은 전국에 500여 개소이다. 자장면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다 한국인이고
이를 먹는 사람도 한국인이니 자장면을 한국음식이라 하여도 과히 어색하지 않다 할 것이다.
한국 자장면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는 '스토리'가 만들어져 있는 청요릿집 공화춘의 건물이다.
짜장면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차이나타운 거리에 있는 자장면 기념물이다. 자장면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놓았다.
옛날 자장면'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장의 색이 검지 않다.
다시 열린 차이나타운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외교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차이나타운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외국 어디에 가도 있는 차이나타운이 한국에는 없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였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재건이 그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지자체의 지원으로 화교는 차이나타운에 다시 모여 음식점을 열었다. 그러면서 자장면에 대한 '스토리'가 개발되었다.
화교가 한반도에 처음 정착한 곳이 인천이고 또 여기에서 처음 청요릿집이 문을 열었으니
자장면은 인천 차이나타운 개발 음식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1905년 개업한 공화춘이 1984년 폐업하여 버려져 있었는데, 2012년 4월 말 이 건물에 '짜장면 박물관'을 열게 된다.
휴일이면 차이나타운은 관광객들로 크게 붐빈다. 대부분 한국인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장면을 먹는다.
한국 자장면의 발상지에 왔으니 이를 먹고 가야 한다는 강박에 따른 것이다.
손님이 워낙 몰리니 수타면은 엄두를 못 내고 춘장은 다들 똑같은 공장의 것을 쓴다 하여도
이 유서 깊은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먹는 자장면이니 그 맛이 색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100년 전 자장면이라 하지만
차이나타운의 한 중국집이 인기리에 팔고 있는 '100년 짜장'이다.
100년 전의 자장면처럼 화학조미료 없이 춘장에 고기만 볶아 국수에 올렸다.
양파에 감자, 애호박 따위를 넣고 볶고 또 전분을 넣어 걸쭉하게 한 것은 '개량된 자장면'이라 본 것이다.
100년 전의 자장면 모양은 이와 비슷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자장면도 춘장은 공장의 것이다. 그 옛날 자장면은 없다.
글·사진/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